김영근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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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1908년 7월 13일 ~ 1970년 11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이다.

김용식 선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축구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로 알려져있다.


학창 시절[편집]

평양 출신으로[1] 광성보통학교, 숭실중학교, 숭실전문을 중퇴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발이 컸다고 하며, 보통학교 시절부터 볼차는 재주에 두각을 나타냈던터라 숭실중학에 스카우트 되어 대활약을 하셨다는 후문. 이후 1927년 숭실중학 소속으로 제10회 전국중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全国中等学校蹴球選手権大会)[2]에 참가, 히로시마 제1중학을 결승전에서 6:1로 박살내는 대활약을 펼쳐 단박에 주목을 받는데 성공하였으며,[3] 이후 경신중학이 잠시 김영근 씨를 스카우트 해가기도 했으나,[4] 어머니의 죽음과 숭실중학 시절 은사였던 차재일 코치와의 인연, 광주학생운동 발생 등 다양한 이유로 다시 숭실중학으로 돌아와 학교를 마친 뒤에는 숭실전문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숭실전문 2학년 재학 도중이던 1938년,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폐교를 결정하면서 김영근 씨의 학창 생활도 끝나고 말았다.


성인 시절[편집]

숭실전문을 나온 뒤 진남포 제련소에 입사, 그곳에 축구부를 만들고 감독 겸 선수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직장 생활도 영위하는듯 했는데.. 명성이 쟁쟁했던 그를 중국팀이 스카우트하면서 인생이 꼬이게 된다. 당시 김영근 씨는 중국에 가서 축구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제의를 승낙했으나, 당시 중국은 중일전쟁이 한창인 상황이었다. 결국 전황이 악화되자 김씨는 소속팀을 떠나, 전쟁터 한복판에서 피난 생활을 해야했으며 2년이 넘는 피난 생활을 홀로 버텨내면서 몸이 상할대로 상하고 말았다. 간신히 평양을 떠난지 4년여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를 반겨줄 것은 가족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광복 직후라 김씨를 받아줄만한 변변한 축구팀이 전무했거니와, 모아둔 재산도 모두 소진한 뒤였기 때문. 결국 그는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성치않은 몸을 이끌고 광산으로 들어갔고, 여기서 몸을 버리면서 왼쪽 눈 시력이 악화ㆍ결국 실명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5]


월남 이후[편집]

1951년 1.4 후퇴 당시 부인과 자식을 평양에 두고 홀로 월남하였다.[6] 이후 1951년 대구방직에서 선수 겸 코치 생활을 하면서 축구인의 길을 걸었으며, 조선방직대한중석에서 축구부를 운영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대한중석 시절에는 영월 출장소 경비원 신분으로 재직하면서, 소장의 부탁으로 대한중석 축구단을 구성하였고 이것이 훗날 박태준 회장에 의해 크게 발전하면서 포항 스틸러스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이 50을 훌쩍 넘기자 대한중석 측은 그를 퇴사시키고 만다.


말년[편집]

대한중석을 나온 뒤 서울 구파발에 단칸방을 얻고 말년을 보내셨다. 유일한 낙은 효창운동장을 찾아가 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셨다고.. 이후 1970년 월간축구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동년 11월 14일 오후 9시경 홀로 숨을 거두셨다.[7] 향년 62세. 유품은 단 책 2권 뿐이었다고 하며, 장례식은 대한중석ㆍ대한축구협회ㆍ평양축구단 OB의 도움으로 진행된 뒤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덕산면 손정리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국가대표 시절[편집]

숭실중학 시절부터 평양 축구단 소속으로 중국 원정을 소화했으며, 1935년에는 조선축구협회대표팀으로 제15회 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 동대회를 우승을 거머쥐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8] 하지만 일본 대표팀 감독과의 전술 견해차와 식민지인에 대한 괄시를 참다못해 대표팀에서 퇴소하여 국가대표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에피소드[편집]

  • 숭실중학 시절에는 축구 뿐만 아니라 스피드 스케이팅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개최된 전조선스케이트대회에 참가한 기록이 남아있다.
  • 김용식 씨와는 여러가지로 인연을 맺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경신중학 재학 시절 동거동락하는 사이였고, 연습도 함께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다만 두 분 모두 승부욕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성미셨기 때문에, 서로를 친우이자 라이벌로 여기셨다고.. 훗날 김영근 씨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자 대구방직, 조선방직 등에 일자리를 주선해준 것도 김용식 씨였다고 한다.


외부 링크[편집]

'비운의 축구 천재' 김영근을 아시나요?'[9]

동양 최고 스트라이커 풍운아 김영근


참고[편집]

  1. 월간축구 70년 9월호에 실린 김영근 씨 인터뷰 기준. 다만 김현회 씨의 칼럼에 의하면 평안남도 순천군이라 기재되어 있다.
  2. 우리나라에는 전일본중학선수권 대회라고 알려져있다. 해당 대회는 2016년 현재, 전국고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全国高等学校サッカー選手権大会)라는 명칭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결승 이전 토너먼트 경기에서는 12:0, 12:0, 7:0 을 기록하셨다고 월간축구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으나, 실제 기록은 1라운드 11:0, 준결승전 6:0이었다.
  4. 이 당시 경신중학 소속으로 서울 살이를 하면서 김용식 씨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었다고 한다.
  5. 김현회 씨 칼럼에서는 기생 김계향과의 인연, 일본인 탄광 소장과의 다툼으로 인한 실명 등의 얘기가 있으나, 인터뷰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다.
  6. 홀로 월남한 이유는 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가족을 버리고 홀로 내려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술과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7. 김현회 씨 칼럼에는 1972년 12월 태릉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되어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8. 당시 김용식 씨와 더불어 유이하게 일본 대표팀에 포함된 조선인 축구 선수였다.
  9. 김영근 씨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칼럼이나, 월간축구에 실린 김영근 옹 인터뷰와는 다른 내용이 많다. 본 문서는 월간축구 인터뷰 기준으로 작성했음에 유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