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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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상)과 김진국(하)선수의 현역시절‎

김재한(金在漢,1947년 12월 20일~ )은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싸카(SSAKA)스포츠 사장이자 2007년부터 대한축구협회의 상근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차범근 센터링, 김재한 헤딩"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표 공격수로 이후의 유망 장신 공격수들은 제2의 김재한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뒤따를 정도로 190cm 이상 공격수의 대표격인 선수였다.



프로필[편집]

  • 이름 : 김재한
  • 생년월일 : 1947년 12월 20일[1]
  • 국가대표 경력
19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표
1980년 AFC 아시안컵 아시아예선 대표
1972년 ~ 1979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57경기 출장 33골 기록)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지도자 프로필[편집]


학창 시절[편집]

194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김재한 씨는 중학교 졸업할 시절까지도 야구 선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참가한 제43회 전국체전에서 김재한 선수가 이끌던 야구팀은 전패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하였고, 결국 야구의 길을 방황하던 김재한을 김천고등학교 축구부가 스카우트하여 포워드로 기용하면서 축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대구고 야구부를 거쳐, 대구 성광고등학교로 전학해 활동하던 고교 3학년 시절, 당시 제일모직 코치였던 안종수 씨에게 픽업되어 제일모직에 입단하게 되었다.[3]


선수 시절[편집]

김재한 선수가 입단한 제일모직은 당대 최강의 팀으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김선수에게 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후보 선수를 벗어나기 위해 김재한 씨는 장경환 코치를 찾아갔고 장코치는 김재한 선수를 건국대학교 축구부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건국대 졸업과 군복무를 마친 1970년 봄, 김재한 선수는 국가대표 발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거듭하게 된다. 한때 다리 골절상을 입으며 위기를 겪기도 하였고,[4] 소속팀인 제일모직이 1971년 해체되는등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결국 주택은행 이적 후 1972년 드디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지도자 시절[편집]

1980년부터 주택은행 축구단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재한 씨는, 오인복 감독을 보좌하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이후 1989년까지 10년간 주택은행 축구단을 이끌며 실업축구계의 유명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83년에는 메르데카컵 참가를 위해 조직된 실업선발팀 코치를 맡기도 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감독직을 수행하는 틈틈히,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직장인 시절[편집]

1989년을 끝으로 주택은행 축구단 감독직을 그만두고, 주택은행 개포지점 차장으로 부임해 은행 행정가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대한축구협회 시절[편집]

플레이스타일[편집]

에피소드[편집]

  • 1970년대 190cm에 달하는 장신 스트라이커로 화제가 되었던 선수이다. 김재한 선수가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1973년도만 해도 차범근이 178cm의 키로 장신의 스트라이커라는 평을 들었는데, 차범근 선수보다도 12cm나 더 큰 선수가 나타났으니[5] 축구팬들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김재한 선수 등장 이전까지 공중볼에서 큰 약점을 보였던 한국축구는 이후 김재한을 필두로 장신 스트라이커가 잇달아 한국축구계에 등장하면서 공중볼 축구에 차차 적응하게 된다.
  • 가족 관계로는 아내 조영순(趙榮順)[6]과 1남 1녀 (김현동, 김현지) 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1947년 4월 1일생 혹은 1948년생으로 프로필마다 다르나 과거에는 출생신고를 미루거나 양력과 음력이 혼용되어 출생년월일이 정확하지 않았으므로 대한축구협회 프로필상의 12월 20일로 기록합니다.
  2. 현 경상북도 김천시
  3. 즉 요약하면 김천 서부초등학교 → 김천중 (야구) → 김천고(축구) → 대구고(야구) → 성광고(축구) 선수로 야구와 축구 선수를 오가며 활동한 셈.
  4. 보통 부상이 아니라 왼쪽 다리뼈가 3조각으로 부서진 끔찍한 부상이었다. 김선수가 슛팅을 한 뒤 넘어졌는데, 넘어진 김선수의 왼쪽 다리 위로 상대팀 골키퍼의 몸이 포개지면서 하중이 실렸던 것. 이로 인해 김선수는 부서진 조각을 백금볼트로 잇는 대수술을 받고, 5개월의 재활을 거친 끝에 간신히 그라운드에 복귀할 수 있었다.
  5. 사실 김재한 선수가 차범근 선수보다 6살 위다. 다만 차범근은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각광을 받았고, 김재한은 26살이 되어서야 처음 대표팀에 뽑혔던 것.
  6. 조영순은 재일교포 출신의 여자 농구선수로 이와모토 에이코(岩本栄子)라는 이름으로 일본 니찌보(日紡)-유니티카 피닉스의 선수로 활약하며 1968년과 69년, 2년 연속 일본 여자농구 베스트 5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귀화를 거부한 뒤 팀에서 퇴출되었으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제일은행 여자농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후 여자 농구 대표팀 주장을 역임하면서 태릉선수촌에서 김재한과 만나게 되었다고.. 1974년 10월, 조영순이 가족을 만나러 일본에 가있는 동안 김재한 선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한일정기전에 참가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에 1:4로 대패를 당하고 만다. (한일대학축구정기전 각주에도 나와있듯, 이 경기는 무조건 한국이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연고전 일정이 한일정기전과 겹쳤던터라 차범근, 황재만, 김호곤, 김희태 등 붙박이 대표팀 멤버 4명이 빠졌고 결국 한국팀은 1:4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때 만회골을 김재한 선수가 득점하긴 했는데.. 워낙 대패를 당한지라 김재한에게도 비판이 쏟아졌다..) 이를 목도한 조영순이 김재한을 위로하면서 친분이 쌓여 결국 결혼에 골인, 국가대표 커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