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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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로얄즈 시절의 김희태

김희태(1953년 7월 10일~)는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로 197,80년대 국가대표로 활약한 선수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김희태
  • 출생일 : 1953년 7월 10일
  • 신체 : 170cm / 66kg
  •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 국가대표 경력
1973년 ~ 1979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통산 A매치 15경기 출장)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대우 로얄즈 1983 2 2 0 0 0 0 0
통산 (K리그) - 2 2 0 0 0 0 0
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2년 3월 1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편집]


유소년 시절[편집]

서울 대신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나온 선수이다. 대신고 시절, 하프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하였으며 특히 활동량과 스피드가 좋아 상대 수비수들이 김희태 선수를 벗겨내지 못해 고전을 하곤 하였다.[1] 이후 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한 김희태 선수를 놓고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학교가 각축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2] 연세대학교 시절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기 시작한 김희태 선수는 73년 킹스컵 우승의 주역으로 대활약하기도 하였다.


실업 시절[편집]

1976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김선수를 두고 실업 축구팀들은 각축을 벌였으나, 최종적인 스카우트 승자는 주택은행 축구단이었다. 주택은행에서 1년을 뛴 김선수는 이듬해인 1978년 공군에 입대하였으며,[3] 1979년 공군을 비롯한 3군의 축구부가 성무로 통합되면서 성무에서도 1년간을 활약한 후 전역하였다. 전역 후 주택은행에서 활약하던 김희태 선수는, 1982년 당시 코리언리그에 참가하고 있던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였으며 1983년 수퍼리그에 참가하여 2경기를 소화 후 은퇴하였다. 82년 입었던 늑골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은퇴를 종용받았다고.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대우 로얄즈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희태 씨는 1987년 리그 우승 등을 경험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아갔다. 특히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본선 전패의 충격 이후, 이차만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았을 당시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되기도 하였고[4] 90년에는 동독 출신의 프랑크 엥겔 감독, 91년에는 헝가리 출신의 비츠케이 감독 등 외국인 감독을 모시며 선진 축구 경험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였다. 이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활동하며, 94년 아주대 축구부를 춘계대학축구연맹전추계대학축구연맹전 동시 석권,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지도력을 인정받아 1994년 9월 급히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임명 되었다.[5] 김희태 감독은 94년 팀 분위기를 추스리며, 95년 반등을 노렸지만 95년 전기리그 5승 3무 6패를 기록하며 8개팀 중 4위에 그치며 부진하였고[6] 결국은 김희태 감독은 부임 11개월만에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고 말았다. 대우 로얄즈는 이후 신우성 스카우터를 감독대행에 앉혔으나 후기리그를 맞이하였으나, 결과는 4승 2무 8패를 기록하며 후기리그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근황[편집]

대우 로얄즈 감독 사임 후 명지대학교 축구부 감독 겸 교수로 부임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후 2013년 현재는 김희태축구센터의 총감독을 맡고있으며 2014년부터 챌린저스리그에 참가 예정인 의정부 시민축구단의 감독직도 맡는 등 경기도 포천시 및 의정부시 등 경기북부 일대에서 축구계의 대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에피소드[편집]

  • 김희태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프랑크 엥겔 감독에게서 배운것이 지도자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크 엥겔 감독이 처음 대우에 들어올때만 해도 생소한 전술과 훈련체계 때문에 개성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우 선수단들이 엥겔 감독의 말을 잘 듣지않았고[7] 이럴때마다 엥겔 감독과 김희태 코치간에 언쟁이 잦았다고. 이렇게 입씨름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둘 배우게되었고, 특히 엥겔 감독이 가져온 자료들을 모두 필사해두었던게 특히 도움이 되었다는 증언. 훗날 엥겔 감독이 떠나고도 한참 지난 후 1994년 미국 월드컵 경기들을 보면서, 엥겔 감독의 축구가 세계흐름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1972년 대통령금배고교축구대회에서 김희태 선수의 수비력은 빛을 발해 본선 토너먼트부터 4강까지 4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결국 대신고는 영등포공고를 무찌르며 72년 금배 우승을 차지했고 대회 최우수선수는 김희태에게 돌아갔다.
  2. 당시 김희태 선수는 스카우트 비를 받고 한양대학교 축구부에 입소한 상태였으나, 대신고 측이 스카우트 비용을 한양대에 되돌려주고 김선수를 연세대학교로 진학시켰다. 김희태 외에 최돈원이란 선수도 대신고 측은 연세대학교에 진학시키려 하였으나, 최돈원 선수는 끝끝내 대신고의 의도와 다르게 고려대학교에 진학해 대신고 축구부가 해체선언을 하는 등 한동안 말썽이 있었다. 이후 김희태는 국가대표로 승승장구한 반면, 최돈원은 기업은행 축구단에서 뛰다가 조용히 은퇴하였다.
  3. 당시 공군에는 김희태 선수 외에 차범근, 황재만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활동 중이었다.
  4. 단 이차만 감독은 불과 1달여만에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5. 94년 대우 로얄즈는 조광래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후, 정해원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직을 맡아 3개월정도 활동하였으나, 팀 역사상 최다연패인 7연패를 기록하자 김희태 감독을 급히 모셔온 최악의 상황이었다.
  6. 바로 직전년도에 전북 버팔로와 꼴찌 경쟁을 벌이던 흑역사급 팀을 이정도로 끌어올린 것도 대단한 공로였지만, 대우 프론트에게는 만족할만 성적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김주성, 샤샤까지 데려와 전력이 강화된 마당에 성적이 반등되지 않았다고 김희태 감독을 쪼아댔고 결과는 감독직 사임.
  7. 이런 선수단 장악 실패가 엥겔 감독이 준우승을 거두었음에도 짤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