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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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문서의 내용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관련한 역사적 내용을 서술한 것이다.


광복 이전[편집]

조선축구협회 대표팀의 구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전경성축구단 (조선대표팀)입니다.


광복 이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는 대한축구협회의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기에 이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대한축구협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축구협회는 1933년 9월 19일 조직되었으며 초대 협회장은 보성전문학교 (오늘날의 고려대학교) 교장이었던 박승빈 씨였다.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됨에 따라 1921년부터 조선체육회 (대한체육회의 전신) 가 개최해왔던 전조선축구대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의 전신) 의 진행 및 각종 중고등축구 대회 창설등의 업무가 조선축구협회에 승계되었던 바 있었다. 이렇게 조선축구협회가 발족한 후 1935년, 당시 일본축구협회는 다가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위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선발전을 겸하는 제15회 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일본 축협 측은 조선에서도 축구선수권 참가팀을 구성하라는 통지를 하였던 바 있다.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조선축구대표 선발전을 실시하여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선수단을 구성한 바 이것이,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이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신이자 한국 축구 최초의 축구협회가 구성한 국가대표라 하겠다.


1935년 5월 처음 발족한 한국 축구 최초의 대표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35년 5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참가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조선축구협회 대표 이인규권희창 조선축구협회 작고
경성축구단 대표 배석환
감독 현정주
매니저 이영선
선수단
GK 이혜봉 경성축구단 작고
FB 박규정 보성전문
정용수 연희전문
이봉호
HB 김병희 보성전문
이유형 연희전문
강기순 평양축구단
박형렬
FW 최성손 경성축구단
이영민
김용식 보성전문
배종호
박효제
이정현 평양축구단
박의현
김영근
김경한 연희전문
후보
김성간, 이치순, 이정식, 채금석, 고홍관

이렇게 구성된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은 일본축구선수권에 참가 당시 일본 최강의 팀이었던 일본 나고야와 문리대학을 각각 6:0, 6:1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해 일본축구계를 경악시켰다. 본래 이 대회는 베를린 올림픽대표 선발전의 목적을 갖고 있었으나 우승을 일본팀이 아닌 조선대표팀이 차지해버렸으니 일본 축구계의 곤혹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결국 일본 대표 선발건은 동년 가을 개최 예정이었던, 명치신궁경기대회 이후 논의되기로 슬그머니 말을 바뀌었고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명치신궁경기대회를 앞두고 제2차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을 구성하여 파견하니,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명치신궁경기대회 우승 후 기념 촬영한 조선대표팀. 화질이 좋지는 않으나, 뒷줄 우측에서 2번째 김용식 선수나, 앞줄 가운데 이유형 선수등의 모습이 확인 가능하다.
1935년 10월 명치신궁경기대회 참가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조선축구협회 작고
매니저
선수단
GK 이혜봉 경성축구단 작고
FB 박규정 보성전문
정용수 연희전문
박형렬 숭실전문
HB 김용식 보성전문
윤창선 숭실전문
강기순 평양축구단
박인식
이유형 연희전문
FW 최성손 경성축구단
이영민
배종호 보성전문
이정현 평양축구단
이치순
박제환
김영근 숭실전문
김성간 연희전문

그리고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조선대표팀은 타이완 선발, 하코다테, 간사이대학, 게이오대학 팀을 모조리 물리치며 연거푸 우승을 차지, 일본 축구보다 조선 축구가 한수준 위임을 입증해보였다. 이처럼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강호로 군림하였던 조선대표팀은 이후 만주국 원정이나 상해 원정등 대외 원정도 여러번 거쳤고, 조선대표로 일제 국가대표 선발진을 완파한 기록도 갖는등 조선대표팀으로써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체육 행사의 금지 내지 축소, 1942년 조선축구협회 강제 해산, 선수들의 강제 징용을 피한 잠적 등 여러 사유가 겹치면서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은 와해되었으며 이후 1945년 광복 후에야 축구협회가 재건되면서 대표팀의 역사는 부활하게 된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 이후 국가대표 재건[편집]

광복 직후 김용식 선생의 주도로 교통부 축구단 (오늘의 대전코레일 축구단)이 창설되고, 과거 조선축구협회 출신 선수들을 모았으나 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국과 경비 부족으로 말미암아 교통부 축구단은 수개월만에 해체되었고 제대로된 축구 경기도 이뤄지지 못한채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가대표팀 구성은 언감생심이었는데.. 그러다 1946년 무렵 평양 축구단 출신을 비롯한 많은 체육인들이 대거 월남해 서울에 정착하면서 체육 붐이 조성되었고, 이에 김용식 씨는 조선전업 축구단 (오늘의 경주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 창단하여 다시금 선수들을 끌어모았으며, 조일양조고려대학교 등 여타 축구부 vs 조선전업간 친선 매치도 잇달아 성사시키면서, 서서히 한국축구 부활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8년 5월 21일, 드디어 조선축구협회는 FIFA에 정식 가입하며 A매치 경기에 자국 대표팀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8년 7월 6일, 런던 올림픽 참가를 코앞에 두고 홍콩 원정 경기를 성사시키면서 광복 후 첫번째 대표팀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하는 광복 후 첫번째로 구성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명단이다.


1948년 7월 홍콩 원정 대표팀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박정휘 KFA 작고
선수단
GK 차순종 조선전업 작고
홍덕영 고려대학교
FB 박규정 조선전업
박대종
김용식
민병대
이시동 조일양조
HB 최성곤 조선전업
김규환
이유형 조일양조
FW 배종호 조일양조
정국진
오경환
우정환 조선전업
정남식
안종수

이렇게 구성된 한국 대표팀은 홍콩팀을 맞이해 전반에만 3골을 쏟아넣으며 5:1 완승, 한국 대표팀 첫번째 A매치를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한다. 당시 정남식 선수가 경기 시작 5분께부터 선취골을 득점한 것을 시작으로 총 4골을 기록하고, 정국진 선수가 1골을 기록하였다고 하며, 이 기록에 따를 경우 한국 대표팀 1호골 및 1호 해트트릭 모두 정남식 선수의 차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예행 연습차 벌인 A매치를 완승하며 개가한 대표팀은 1달여 뒤 곧바로 치러진 런던 올림픽에도 홍콩 원정 경기 명단과 동일한 선수들로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참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도전사#1948년 런던 올림픽입니다.


6.25 동란 이전까지[편집]

1972년 월간축구에 소개된 당시 경기 사진

런던 올림픽에서 돌아온 뒤 해단하였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재차 소집된건 3개월여 후인 1948년 11월의 일이었다.[1] 당시 홍콩축구협회의 초청을 받은 대한축구협회가 이를 승낙하면서 홍콩/베트남/마카오 3개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는 동남아 원정단이 조직되었던 것.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선수들을 선발하여 약 20여일간 합숙 훈련 후 크리스마스를 서울에서 보낸 뒤, 홍콩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을 출국시켰다. 해당 선수단 명단은 아래와 같다.


1949년 1월 ~ 2월 홍콩/베트남/마카오 원정 대표팀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박정휘 KFA 작고
코치 이유형김성간
선수단
GK 서강국 연세대학교 작고
홍덕영 고려대학교
FB 박규정 조선전업
박대종 조흥은행[2]
차운전 연세대학교
이시동 조일양조
HB 강희조 고려대학교
김규환 조선전업
최성곤 조선전업
김지성 연세대학교
FW 정국진 조일양조
배종호 조일양조
장경환 연세대학교
최병섭 고려대학교
최일건
황정하
민병대 조선전업
정남식
안종수
1950년 4월 홍콩/마카오 원정 대표팀 명단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이용겸 KFA 작고
코치 김화집
주무 김혁동
심판 김성간
선수단
GK 오인건[3] 전매청 작고
전성원[4] 조선전업
FB 강희조 고려대학교
박대종 대전방직
이시동 무소속
HB 주영광 해군
김규환 조선방직
홍종칠 대구방직[5]
민병대 조선전업
이종갑
FW 정국진 해군
박건섭
최영근
김용식 조선전업
이한상
이기주 전매청
장경환 연세대학교
정남식 대전방직

장장 45일간, 홍콩/베트남 사이공/마카오 3개 도시를 주류하며 총 8차례 경기를 치렀으며 5승 1무 2패의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크리스마스 전후의 추운 날씨를 보내다, 남방에 찾아간 한국 대표팀은 더운 날씨에 익숙하지 못하여 고전하였으나 이러한 악조건을 딛고 호성적을 거두었던 것. 이에 홍콩축구협회는 익년인 1950년에도 재차 한국대표팀을 초청하여 총 4차례 경기를 더 가졌는데.. 이전의 경험을 살려 현지 적응을 빠르게 마친 한국 대표팀은 3승 1패의 빼어난 성적을 거둔 뒤 고국에 귀환하였다. 그것이 1950년 4월, 6.25가 터지기 불과 2달여 전의 일이었다.


6.25기간 중 진행된 싱가포르 원정[편집]

6.25 동란이 한창 격화되었던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축구 국가대표팀 구성은 언감생심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2년께부터 전쟁의 포성은 지금의 휴전선 일대의 고지전으로 국한되면서, 스포츠 활동 재개에도 숨통이 트였고[6] 때마침 52년 겨울 싱가포르 축구협회가 초청장을 보내오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쟁 속에서도 다시금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후 53년 3월 대표팀은 부산을 출발해 싱가포르에 도착,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과 총 4차례의 친선 경기를 치렀고,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도 치른 뒤 귀국하였다. 당시 전적은 3승 1무 1패 10득 7실을 기록하였다. 특히 이 때의 대표팀은 최정민, 박재승, 정형식, 우상권, 김동근, 김영일 등 신진 멤버들이 대거 포함되어 세대 교체의 형태도 띄고 있었으며, 이 때를 전후해 김용식, 이기주, 박대종 선수 등 일제시대부터 활약해온 노장 선수들이 대표팀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7]


박대종 씨가 월간축구 1972년 11월호에 제공한 대표팀 출정 기념 사진. 다만 해당 사진이 게재된 기사에서는 1953년 치러진 원정을 52년 있었던 일로 잘못 기재하고 있다.
1953년 3/4월 싱가포르 원정 대표팀 명단
포지션 이름 현 소속팀
스탭진
단장 김화집 작고
코치 김용식
선수단
GK 홍덕영 작고
전성원
FB 박재승
박대종
심완섭
민병대
박규정
HB 주영광
홍종칠
이기주
박일갑
이상의
FW 최정민
심완섭
최영근
김동근
우상권
임성유
김영일
강정호
정남식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월간축구 1972년 10월호 박대종 씨의 인터뷰에서는 1949년 12월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아일보 라이브러리 기사 ([1])에 1948년 11월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
  2. 당시 조흥은행 축구단은 창단 이전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박대종 씨가 잠시 행원 생활을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하지만 몇달 후 발표된 명단에서 박대종 씨의 소속은 대전방직으로 변경/기재된 것으로 보아 조흥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던듯..
  3. 이전 버전에는 구인건이라 되어있었으나, 오인복 선수의 형인 오인건 선수의 오기로 보여 수정하였다.
  4. 이전 버전에는 김성원이라 되어있었으나, 전(全)을 김(金)으로 오독한 것으로 보여 수정하였다. 참고 기사 : [2]
  5. 조선방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대구방직은 사실상 조선방직 B팀 격이었다.
  6. 때문에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참가를 위해 축구 대표팀이 꾸려지기도 했었던바 있다. 하지만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는데, 자세한 사항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문서를 참고
  7. 다만 민병대, 박규정, 정국진 등 일부 선수들은 1954년 ~ 1956년까지 좀 더 선수 생활을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