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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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박양하

박양하(1962년 5월 28일 ~ 현재)는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로, 현재 경남 FC 소속이다.

한국 축구계에 알려진 대표적인 비운의 천재 중 한명으로 한국의 조지 베스트로도 불리었다.


선수 프로필[편집]

  • 이름 : 박양하
  • 출생일: 1962년 5월 28일
  • 신체 조건 : 171cm / 66kg
  • 국가대표 경력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1차예선 선발
(통산 A매치 1경기 출장)
  • 현 소속 클럽: 은퇴


  • 리그 기록
소속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대우 로얄즈 1986 20 2 1 6 0 0 0
1987 5 2 0 1 0 0 0
1988 14 3 1 2 1 0 0
1989 5 5 0 0 0 0 0
1990 5 5 0 0 0 0 0
통산 (K리그) - 49 17 2 9 1 0 0
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3년 1월 1일 기준.


지도자 프로필[편집]

김해 감독 시절 박양하
  • 이름 : 박양하
  • 출생일: 1962년 5월 28일
  • 신체 조건 : 171cm / 66kg
  • 현 소속 클럽:
  • 직책:
  • 약력
소속 연도 직책
부산 대우 로얄즈 1992 ~ 1999 트레이너, 코치 및 거제고등학교[1] 감독
부경대학교 2001 ~ 2007 감독
김해시청 축구단 2008 ~ 2009 감독
경남 FC 2013 ~ 2014 2군 코치(2013)
유소년 계발 총괄(2014)
  • 성인 클럽 감독 기록
소속 연도 리그 순위 리그컵 FA컵
김해시청 축구단 2008 전기 7 1 5 5위 8강
2008 후기 7 1 5 5위
2009 전기 8 2 3 1위 4강 1라운드
2009 후기 4 4 4 6위
2009 플레이오프 1 0 2 준우승
통산 (내셔널리그) - 27 8 19 - - -


창신공고 시절[편집]

창신공고 재학 시절부터, 박양하 선수의 재능은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아직 공격형 플레이메이커 개념이 유럽에서도 제대로 확립되기도 이전, 박양하 선수의 움직임은 오늘날로 따지면 플레이메이커와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혼합형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하프백 (오늘날의 미드필더) 들에게 요구되지 않았던 드리블, 스피드, 개인기, 골결정력 어느 것 하나 빠지는게 없었음에도 그는 팀 내 득점을 도맡기 보다는 하프백으로 뛰는 것을 선호했다. 발군의 전진 패스로 공격수 발앞에 떨어뜨려주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고, 본인도 스스로 골을 넣기 보다 한방에 적진을 무너뜨리는걸 너무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2]

요컨대, 박양하 선수의 등장은 한국 축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준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 패러다임의 구축과 증명은 오로지 박양하 선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박양하 선수의 플레이를 흉내낼 수도, 흉내낼 엄두도 내질 못했다.


대우 입단[편집]

그러나 시대는 박양하가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이유는, 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을 4강 반열로 끌어올린 박종환 감독의 축구 철학이 당대 한국 축구의 기본 패러다임으로 정착해버린데 있었다. 박종환식 축구는 약 6가지 정도의 정형화된 전술을 무한 반복 시킴으로써 선수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고, 감독이 경기중 흐름에 따라, 6가지 패턴 중 하나를 지시하면 이를 반복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는게 전부였다. 경기 중 상황에 맞춰, 선수가 스스로 생각해 움직이느냐, 감독의 손가락만 바라보느냐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그리고 박양하는 결코 감독의 손가락이나 쳐다볼 성격의 선수는 못됐다.


사실, 박양하 선수의 운명은 그 시점에서 결정난거나 다름없었다.


1985년, 고려대를 졸업후, 박양하가 입단한 팀은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우 로얄즈였다. 당시 로얄즈의 감독은, 차범근조광래, 장외룡 등을 길러낸 고 장운수 감독이었고, 장운수 감독은 박양하의 성미와 재능을 한눈에 파악, 그에게 전진형 하프백 역할을 맡기게 된다.


대활약과 보헤미안[편집]

데뷔시즌이었던 86시즌의 박양하의 활약은 가히 대단했다. 20경기 출장 1골 7도움이라는 기록이 주는 감흥과는 별개로, '요새 대우 축구를 보면 지금까지 본 축구와는 어딘가 좀 다르다.' 는 느낌을 관중들에게 확실히 심어주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축구는 수비는 몸으로 밀어붙이고, 미드필더는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공격수는 한 번의 롱패스를 어떻게든 득점으로 연결해야 하는, 소위 '죽어라 뛰어다니나 실속은 없는' 축구의 전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양하는 몸싸움이 능한것도 아니요, 골을 넣는 선수도 아니었지만 그의 발끝에서 나오는 패스는 간결하면서도 창조적이었다. 죽어라 뛰어다니기만 하던 상대팀 선수들은 90분 내내 별로 뛰지도 않는 한 선수에게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곤 했다. 훗날 축구선수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몸상태가된 박양하를 이회택 감독이 국가대표로 호출했던 이유도, 그가 보여줬던 86시즌의 움직임이 90년대 세계 축구 트렌드를 정확히 예언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데뷔시즌의 대활약과 맟물려, 박양하 선수의 불성실한 훈련 태도와 음주와 숙소 이탈 등, 탈선의 정도도 나날이 심해져갔다. 장운수 감독은 그런 박양하를 어르고 타이르면서, 조련했지만, 86시즌이 끝나고 새로이 대우에 부임했던 이차만 감독에게는 박양하의 그런 태도는 어불성설이었고 잘라버려야할 화근이었다. 결국, 박양하와 이차만 감독간의 갈등은, 박양하의 보헤미안 기질을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그의 선수생활은 사실상 끝나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86시즌의 대단했던 활약을 다시 보여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선수 생활 은퇴와 지도자의 길[편집]

1991년 은퇴 이후, 199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코치를 역임했던 박양하는, 2001년부터 부경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김수형, 조재현 등 청소년대표 선수를 조련하며, 축구계의 무명이었던 부경대를 경남지역 주요 대학 축구팀으로 발돋움시키는데 성공했다. 변변한 자원도 들어오지 않았던 부경대 축구부는 오로지 박감독의 역량 하나에 의지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박양하 감독이 김해 시청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부경대 성적이 바닥을 치는걸 보면 더더욱.. 이후, 부경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7년 12월, 김해 시청 축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김해시청은 내셔널리그에 참가한 첫해부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2009년에는 내셔널리그 전,후기 통합 준우승을 달성하며, 한국 축구계에 잊혀진 스타 박양하가 감독 박양하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통합 준우승을 달성한 같은해 12월, 스카우트 비용 편법 사용이라는 석연찮은 이유로 김해시청 감독직을 사임한다.

2013년 9월, 스카우트 겸 2군 코치로 경남 FC에 부임하여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으며 잔류에 기여하였고, 2014시즌을 앞두고 이차만 감독과 이흥실 수석코치가 선임되면서 유소년 계발 총괄로 직책이 변경되어, 2014시즌 활동하였다.


업적 및 수상[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당시 부산 대우 로얄즈의 유스팀이었다.
  2. 훗날 윤정환 선수가 똑같은 이유로 미드필더로 뛰는걸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