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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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K리그 플레이오프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백승철

백승철 (白承哲, 1975년 3월 9일 - )은 포항 스틸러스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활약했던 선수다.

의료사고로 선수 생활을 일찍 접은 비운의 선수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16년 현재 수성대학교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프로필[편집]

  • 이름 : 백승철
  • 출생일 : 1975년 3월 9일
  • 신체 : 178cm / 70kg (선수 시절)
  • 유스클럽 : 영남대학교 졸업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1998 35 21 12 3 3 0
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1999 21 11 8 1 1 0
통산 (K리그) - 56 32 20 4 4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시점 기준.


유소년 시절[편집]

서울 동북중학교, 영등포공고,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선수이다. 동북중을 거쳐 영등포공고를 입단하였는데, 당시 영등포공고 축구부가 썩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백선수의 신장도 왜소한 편이었기에 한때 대학 진학 실패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지인의 추천으로 영남대에 테스트 끝에 입학하게 되었고, 왕년의 골게터 출신인 박수덕 감독의 조련을 받으며 기량을 키워나가기에 이른다. 이후 영남대 축구부를 후원하던 포항 스틸러스와의 연습 게임을 통해서 기량을 인정받아 프로 행을 조율하였다.


포항 시절[편집]

백승철은 영남대를 졸업한 후 1998년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당시 영남대학교와 협력구단이었던 포항 스틸러스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당시 포항은 포철공고 시절부터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이동국이 당연히 포항의 주전 공격수 자리를 꿰찰 것이라 예상하는 상황이었으나, 이동국은 월드컵, 청소년대표에 불려다니는 통에 포항에서의 출장 횟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반면 백승철은 포항 내에서 착실한 훈련을 통해기량을 쌓아 나갔고, 장기인 정확한 슈팅을 바탕으로 박성화 감독에게 주전 스트라이커로 낙점되기에 이른다. 1998년 초에 열린 아디다스컵과 필립모리스컵을 거치면서 2골-2도움으로 팀의 감초 역할을 했던 백승철은 7월부터 시작된 정규리그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7월 18일 안양 LG와의 개막전과 22일 울산 현대와의 2차전에서 연속골을 터트렸고, 전북과의 5차전에서도 1골을 추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침 1998 프랑스월드컵이 끝난 뒤 불어 닥친 엄청난 축구열기와 함께 백승철은 팀 동료 이동국과 함께 포항의 젊은 스타로 폭발적 인기를 구가했다. 갑작스러운 인기로 백승철은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지만, 박성화 감독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 남은 정규리그 7경기에서 6골-1도움을 기록하며, 포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대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백미는 역시 98년 플레이오프 1차전 포항 vs 울산의 경기였다. 당시 포항은 전남 드래곤즈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연장승부까지 가는 접전으로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고, 팀의 주축이었던 박태하, 고정운이 경고누적으로, 공격수인 이동국은 아시아 청소년대회 차출로 합류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면에 울산은 정정수, 김현석 등이 포진한 최고의 전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반 16분 울산의 정정수에게 선제골을 내준 포항은 후반 12분 김명곤의 골로 따라붙었고, 후반 44분에는 최문식이 역전골을 터트리며 극적으로 승부를 마무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인저리 타임이 적용되었던 후반 48분, 울산 김종건에게 헤딩슛을 내주며 2-2 동점을 허용했다. 포항 선수들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포항팬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을 후반 50분 무렵 그 시점에서 얻은 귀중한 프리킥 찬스. 포항의 키커는 당연히 벼락 슈터 백승철이었다. 백승철은 서효원이 밀어준 볼을 달려들면서 벼락같은 슈팅을 때렸고, 이 골은 골대 안에 빨려들어가며 결승골이 되었다. 위의 사진이 그 골을 넣고 기뻐하는 백승철 선수의 모습.[1] 포항은 2차전에서 김병지의 희대의 헤딩골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백승철도 동료인 이동국에게 밀려 K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놓쳤지만, 그 해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며 백승철이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부상, 그리고 의료사고[편집]

1998년 최고의 한해를 보낸 백승철이었지만 1999년 시즌은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로 시작됐다. 호주 동계훈련에서 점프하다 떨어지며 발목을 다친 백승철은 그 후유증으로 상당기간 고생해야 했고, 리그 초반 경기에서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6월에는 99 코리아컵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는데, 백승철은 몸이 좋지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합류를 결심했고, 이는 부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처음에는 1-2주정도 쉬면 괜찮은 부상이었지만, 당시 치열한 플레이오프 싸움을 벌였던 포항을 위해 백승철은 출전을 감행했고 결국, 무릎 인대와 십자인대가 손상된 상태였다. 결국 더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백승철은 수술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백승철은 일생 일대의 실수를 하게 되는데,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지 않고, 포항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점이다. 수술 중 실수가 벌어졌고, 백승철의 무릎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3] 백승철은 결국 수도권에 있는 모병원으로 옮겼지만, 오히려 그 곳에서의 수술로 인해 치명타를 맞고 말았다. 수술 과정에서 외부 병균에 감염되어 무릎 전체에 문제가 생긴 것. 병원 측에서는 수술에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이미 백승철의 무릎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다 참고 현실을 받아들인 백승철은 2년동안 긴 재활에 들어갔다. 안해본 재활이 없을정도로 백승철은 절박했다. 테이핑 치료로 유명한 일본에 가서 3개월 동안 재활에 매달렸지만, 결국 백승철의 무릎은 돌아오지 못했다.


은퇴, 그 이후[편집]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백승철은 1년간 방황하면서 지냈다. 특히 축구하고는 일체 연을 끊고 살았다고.. 하지만, 다시 축구계로 돌아온 백승철은 운봉공고의 문영래 감독의 제의로 운봉공고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2014년부터는 수성대학교 축구부 감독직을 맡아 활동 중에 있다.


에피소드[편집]

  • 백승철은 슈팅을 때릴때 허벅지 근육보다는 무릎과 발목의 힘을 이용해 슈팅을 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슈팅의 정확도는 높았지만, 부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백승철도 그 위험을 비껴가지 못했다.


같이보기[편집]


참조[편집]

  1. 백승철에 대해서 모르는 운봉공고 학생들에게 이 골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준다고 한다.
  2. 백승철은 99년 부천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했지만, 그 전에도 부상은 백승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3. 당시 수술을 한 의사도 큰 병원에 갔어야 했다고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