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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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양회(雙龍洋灰)는 1962년 설립된 시멘트 회사로 대한민국 최대의 시멘트 제조회사이다. 정식 명칭은 쌍용양회공업(주)(雙龍洋灰工業(株), Ssangyong Cement Industrial Co., Ltd.).

쌍용그룹의 모기업이었으며, 동시에 쌍용양회라는 이름의 축구단을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운영[1]하였던 것으로 한국축구사에 족적을 남겼다.


쌍용양회[편집]

1950/60년대 재계 순위 5위의 금성재벌의 오너이자 언론인, 정치가였던 김성곤이 기존 금성방직 등 경공업에서 중공업 위주로 사업을 전환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 쌍용그룹의 모기업이었다. 원래 금성재벌이라 불리었으나 쌍용양회가 영월군 쌍용리에 첫 공장을 기공하기로 하면서 그룹명조차 쌍용으로 변경되었다. 67년 당시로서는 그룹의 주력사업이라 할 수 있는 방직회사 2개를 매각하고 앞으로의 전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멘트 회사 공장을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후 계속된 증설과 인수로 대한민국 최대의 시멘트 회사가 되었으며, 쌍용그룹의 주력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쌍용그룹은 쌍용양회조차 외자와 워크아웃으로 인해 한앤코시멘트홀딩스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 김성곤, 김석원 일가와는 관계없는 기업이 되었다.

연혁[편집]

  • 1962년 쌍용양회 설립, 강원도 영월군 서면(한반도면) 쌍용리에 영월공장 기공. 쌍용이라는 기업명의 유래.
  • 1963년 금성방직 축구단 창단
  • 1964년 영월공장 준공
  • 1966년 동해공장 기공
  • 196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해 금성방직 및 태평방직 매물로 내 놓으면서 금성방직 축구단을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변경. 시멘트 수송을 위해 금성해운(현 쌍용해운) 설립
  • 1968년 동해공장 완공(당시 국내 최대, 계속된 증설로 현재 세계최대 시멘트 단일공장)
  • 1975년 창업자 김성곤 사망. 2세 김석원 쌍룡그룹 회장 취임.
  • 1977년 10월 쌍용양회 건설사업본부가 독립해 쌍용종합건설(현 쌍용건설) 설립.
  • 1981년 12월 쌍용양회 종합전산실 전산팀이 독립해 우성정보산업(현 쌍용정보통신) 설립
  • 1999년 12월 쌍용정유(주) 매각
  • 2000년 6월 페라이트 마그네트, 세라믹 등 신소재 사업부분 쌍용머티리얼로 분사.
  • 2000년 10월 일본 타이헤이요 시멘트로 부터 외자 유치
  • 2002년 기업재무구조 개선(워크아웃) 절차 돌입.
  • 2005년 워크아웃 졸업
  • 2009년 레미콘사업 부분 분리 쌍용레미콘 설립

계열사[편집]

  • 쌍용기초소재 : 시멘트 전문업체, 고로슬래그 시멘트, 슬래그 파우더 등
  • 한국기초소재 : 시멘트 전문업체, 슬래그 등
  • 쌍용레미콘 : 레미콘 제조 전문업체
  • 대한시멘트 : 시멘트 전문업체, 고로슬래그 시멘트 등
  • 대한슬래그 : 슬래그 제조 전문업체
  • 한국로지스틱스 : 한국기초소재의 자회사
  • 쌍용로지스틱스 : 하역 전문업체
  • 쌍용에코텍 : 폐기물 수집운반 재활용 또는 처분사업 (2011년 3월 설립 후 2013년 12월 쌍용양회에 합병)
  • 쌍용인터내셔널 : 쌍용양회와 관련된 무역업무 (2009년 12월 설립 후 2013년 12월 쌍용양회에 합병)

쌍용양회 축구단[편집]

1963년 창단된 금성방직 축구단이 1967년 초부터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게 되었다. 약칭은 쌍용. 금성방직을 대한농산에 넘기기로 발표한 것은 67년 10월이었고 실제 인수인계 된 것은 68년 3월 이었으므로 이미 1년전에 금성방직이 매물로 내 놓는 것을 결정하고 축구팀 명칭을 쌍용양회로 바꾼 듯 하다. 결국 이름은 쌍용이었으나 68년 3월까지는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금성방직 잔디구장을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금성방직 부지를 매가한 이후로는 홈구장 없이 68년까지 활동하다가 쌍용양회 팀은 최종 해체처리 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구 쌍용양회 선수들은 1969년 3월 외환은행 축구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게 되었다.


성적[편집]

금성방직시절에는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으나 1967년 양지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유력 선수들이 차출되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결국 1년여 만에 해체 수순을 밟고 말았다.

  • 1968년
    • 추계 실업축구연맹전 3위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1967년 금성방직을 매각하면서 1963년부터 운영해왔던 금성방직 축구단을 이름만 바꾸어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존속시켰으나, 1968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