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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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혜덕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자 축구인이다.


선수 시절[편집]

평양 숭덕국민학교, 숭실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을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시절에는 농구와 축구, 양쪽에서 활약하였다고 하며[1] 연희전문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연희전문 소속이자 경성축구단 멤버로 일본, 상해 원정 등에 빠짐없이 참가한 위씨는, 1930년대 조선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940년대 태평양전쟁 격화와 함께 일제에 의해 구기 체육 행사가 금지되자 위씨는 상해로 건너가 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이즈음부터 축구보다 무역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고 한다.[2]


은퇴 이후[편집]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광복과 6.25 등 굵직굵직한 풍파를 넘은 위씨는, 1953년 4월 위덕무역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위덕무역은 195ㆍ60년대 홍콩ㆍ싱가폴 소재의 외국계 기업들과 계약을 체결하고 엘레베이터를 비롯한 다양한 물품을 수입해오는 상당한 규모의 상회사로 성장했던바, 축구인 출신이자 동남아 사정에 밝았고 무엇보다 재력이 뒷받침되었던 위씨는 AFC 아시안컵, AFC U-19 챔피언십 등에 출전하며 동남아 원정을 자주 치러야 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많은 도움을 주며 다수의 국제대회에서 단장ㆍ부단장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급기야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을 정도.[3] 이후에도 1960년대 한국실업축구연맹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기여하던 위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 그곳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편집]

  1.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위혜덕'을 쳐보면, 위씨의 중학생 시절 관련 기사는 모두 농구 기사로 도배되어 있다. [1]
  2. 당시 상해 내 존재하였던 조선인 축구단 명부에 위씨의 이름도 올려져 있었으나, 축구 경기가 벌어져도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령 선수였고 자연스레 은퇴 수순을 밟았다고..
  3. 다만 형식상 감독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감독 역할(엔트리 구성과 선수 지도 등)은 김용식 씨가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