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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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모직(制一毛織, CHEIL INDUSTRIES INC.)은 삼성그룹 내 과거 존재하였던 자회사이다.

1962년부터 1971년말까지 축구단을 운영하였으며, 제일모직 또는 일모[1](一毛) 축구단으로 불렸다. 축구위키인 풋케위키에서 제일모직이라 하면, 제일모직 축구단을 주로 의미함에 유의할 것.


제일모직[편집]

제일모직은 1954년 이병철에 의해 창립된 삼성그룹의 모태 기업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모직 사업으로 시작하였으나, 합섬 등 직물 전반으로 사세를 확장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패션 사업, 1980년대 후반에는 화학 사업, 2000년대에 전자 소재 산업까지 손을 뻗었다. 그러다 2013년 삼성 그룹 후계 구도와 관련하여 패션 사업 부분을 에버랜드로 양도, 2014년에는 전자ㆍ화학 소재 부분도 삼성 SDI에 넘겨주었다. 이후 삼성그룹의 지주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2015년 9월 삼성물산과 합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일모직은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 첫 공장인 대구 공장을 건립하였으며, 일모 축구단도 대구 공장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2]


연혁[편집]

  • 1954년 1월 제일모직공업 주식회사 설립
  • 1955년 12월 대구 칠성동2가에 대구공장 준공(모직)
  • 1963년 4월 일모축구단,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
  • 1965년 한국 최초 울 마크 사용권 획득(IWS)
  • 1969년 경산공장 준공
  • 1971년 12월 31일 일모 축구단 해체
  • 1972년 경산공장 분리,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설립
  • 1975년 증권거래소 주식 상장
  • 1976년 제일모직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안양공장 준공(의류패션).
  • 1978년 구미공장 준공
  • 1989년 영문상호 Cheil Wool Textile에서 CHEIL INDUSTRIES INC.로 변경, 여천공장 준공(화학)
  • 1996년 대구공장, 구미공장과 통합 및 이전
  • 1999년 삼성물산 의류부분인 에스에스패션(갤럭시, 라피도 등) 흡수 통합
  • 2000년 화학 분야로 증권거래소 업종 등록 변경, 칠성동2가 옛 대구공장 부지에 대구오페라하우스 기공
  • 2003년 8월 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완공, 기증
  • 2013년 9월 23일 제일모직 의류패션사업 부분 1조 500억에 에버랜드로 양도 발표[3]
  • 2014년 3월 31일 제일모직 전자소재사업 부분을 삼성 SDI와 1대 0.4425의 비율로 흡수 합병 발표.
  • 2015년 9월 삼성물산과 합병.


사업 분야[편집]

  • 화학수지
  • 전자소재
  • 섬유, 의류, 패션
    • 골든텍스(신사복지)
    • 라피도 (위크엔드), 로가디스 (에스에스패션)
    • 빈폴, 후부, 갤럭시


제일모직 축구단[편집]

1970년대의 대구시민운동장 및 대한방직(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대한방직의 건너편, 시민운동장의 대각선쪽이 제일모직 대구공장이다.사진 우상단부분

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1962년 4월 창단하여 1971년까지 운영하였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역사[편집]

1962년 등장한 광복 이후 최초의 지방 실업 축구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 축구팀으로 활동하였다.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차태성, 정순천, 김순오, 이현 등 군제대 선수들을 싹쓸이하다시피 영입하며 전력이 급상승, 1963년 전국체전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ㆍ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ㆍ도시대항축구제전 등 실업 축구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이후 차태성에 이어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유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모 축구단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 부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는 제일모직의 해체를 필두로 실업축구팀의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사측에 해체 재고를 요청하였으나[4]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케하면서, 제일모직 축구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출신 선수[편집]

제일모직 축구단 소속 유명 선수
문정식조윤옥이규남유판순차태성서성오정순천김재한


홈경기장[편집]

홈구장이라는 개념은 따로 없었지만, 대구시민운동장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일모직 부지 내 잔디축구장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5] 두 시설을 모두 이용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대구시민운동장이 홈구장이었고, 홈구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클럽하우스인 제일모직 기숙사 및 잔디축구장이 있었던 셈.


에피소드[편집]

  • 한국프로야구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대구에서 창단될 당시, 대구에 거점을 두고 있는 삼성계열사가 제일모직 뿐이었던지라 제일모직에서 삼성 라이온즈로 인력이 많이 차출되었다. 이승빈 삼성 라이온즈 사장, 김재하 단장 등이 그 예. 김재하는 삼성 라이온즈 퇴직후 2011년 대구 FC의 단장이 되기도 하였다. 대구의 축구나 야구에 있어 삼성이 큰 영향을 미친 셈.
  • 상기한대로 추앙받을 점이 많은 팀이지만, 한편으로는 흑역사 기록도 있다. 1965년 5월 15일, 금성방직 vs 제일모직의 춘계실업축구연맹전에서 발생한 심판 집단 구타 사건이 그것인데, 당시 제일모직은 금성방직에 PK를 내주며 0:1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반 34분 제일모직의 김홍복 선수가 금성방직의 이풍길 선수에게 차징 파울을 범하자 성낙운 주심이 김선수에게 옐로카드를 꺼냈던바, 해당 판정에 김홍복 선수가 욕설로 응수하자 성주심은 주저않고 레드카드를 꺼내 김선수의 퇴장을 명한다. 그러자 김홍복을 비롯한 문정식, 고일남 등 제일모직의 선수단이 성주심에게 달려들어 구타, 결국 성낙운 주심은 전치 3주의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 제일모직에 1965년 말까지 모든 대회 참가 금지 및 65년 춘계연맹전 성적 말소, 김홍복 선수에게 2년 자격 정지, 문정식/고일남 등은 1년 자격 정지라는 엄중한 처벌을 내린바 있다.[6]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2] (제일모직 축구단 관련 김현회 칼럼)


참고[편집]

  1. 제일은행 축구단과의 구별을 위해서기도 했고 보통 약자를 사용할 때 앞자를 따서 부르나 앞자를 따면 제모가 되므로 부득이하게 일모라 부른듯. 석유공사가 유공이 된 이유와 비슷하다.
  2. 제일모직 대구 공장은 대구시민운동장 바로 뒷편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 대구 오페라하우스 및 홈플러스 1호점인 대구 칠성점을 포함한 부지가 모두 제일모직 대구 공장터이다.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 10만제곱미터 규모로, 삼성은 해당 금싸라기 지역 개발하고 싶어했지만 대구의 부동산 경기 침체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있어 한동안 손을 못대고 있다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사업에 전용, 2015년 2월 대구삼성창조경제단지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3. 제일모직, 패션사업 에버랜드에 넘겨..소재사업 주력 -연합뉴스, 2013년 9월 23일-
  4. 실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어, 일모 축구단 해체 2개월여만인 1972년 3월, 한국합판 축구단마저 해체되었다. 유이했던 지방 실업 축구팀이 2달만에 모조리 사라진 셈.
  5.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김재하씨가 본 호암은 -2010년 1월 13일, 매일신문-
  6. 관련 기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