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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고]] 시절, [[노정윤]], [[이임생]]과 함께 대활약하며 부평고 축구부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선수로 알려져있다. 고교 1학년때 이미 고려대학교 축구부가 스카우트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초고교급 선수였던 곽경근은 고려대에 진학하자마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 총감독이었던 [[데트마르 크라머]]는 곽선수를 두고 몸싸움과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자원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듯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던 곽경근 선수의 앞날은 거칠것이 없어보였다.
 
[[부평고]] 시절, [[노정윤]], [[이임생]]과 함께 대활약하며 부평고 축구부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선수로 알려져있다. 고교 1학년때 이미 고려대학교 축구부가 스카우트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초고교급 선수였던 곽경근은 고려대에 진학하자마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 총감독이었던 [[데트마르 크라머]]는 곽선수를 두고 몸싸움과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자원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듯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던 곽경근 선수의 앞날은 거칠것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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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곽경근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무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 [[십자인대]] 파열을 당하며 축구인생에 암운을 맞이하게되는데 무릎 부상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면서 [[김호]] 감독이 이끌던 [[1994년 미국 월드컵]] 엔트리 발탁에도 실패, 1년여동안 제대로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고려대를 졸업하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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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곽경근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무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 [[십자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며 축구인생에 암운이 드리우는데,  부상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면서 [[김호]] 감독이 이끌던 [[1994년 미국 월드컵]] 엔트리 발탁에도 실패, 1년 여 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고려대를 졸업하였다.
 
      
== 일본 생활 ==
 
== 일본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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