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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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시절의 곽경근

곽경근(1972년 10월 10일 ~)는 대한민국 출신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으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하였다.

2013년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한 부천 FC 1995의 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활동 중.


선수 프로필[편집]

  • 이름 : 곽경근
  • 출생일 : 1972년 10월 10일
  • 신체 : 184cm / 84kg (선수 시절)
  • 국가대표 경력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1997년 ~ 1998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7경기 출장)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등번호 : -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부천 SK 부천 SK 1998 30 14 9 2 5 0 0
1999 36 12 13 8 3 0 0
2000 39 11 9 4 2 0 0
2001 29 13 2 6 1 0 0
2002 21 15 3 0 3 1 0
부산 아이콘스 부산 아이콘스 2003 27 14 0 3 2 0 0
2004 30 3 0 0 3 0 0
통산(K리그) - 212 82 36 23 19 1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0시즌 종료시점 기준.


지도자 프로필[편집]

연도 소속팀 직책
2005 ~ 2012 여의도고등학교 축구부 감독
2012[1] ~ 2013년 부천 FC 1995
2017년 서울디지털대학교 축구부


유소년 생활[편집]

부평고등학교 시절, 노정윤, 이임생과 함께 대활약하며 부평고 축구부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선수로 알려져있다. 고교 1학년때 이미 고려대학교 축구부가 스카우트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초고교급 선수였던 곽경근은 고려대에 진학하자마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 총감독이었던 데트마르 크라머는 곽선수를 두고 몸싸움과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자원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듯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던 곽경근 선수의 앞날은 거칠것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곽경근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무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며 축구 인생에 암운이 드리우는데.. 부상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면서 김호 감독이 이끌던 1994년 미국 월드컵 엔트리 발탁에도 실패, 1년 여 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고려대를 졸업하였다.


일본 생활[편집]

아무리 부상으로 쉰 기간이 길었다지만, 국가대표급 공격 자원인 곽경근 선수를 탐내는 팀이 많았다. 요컨대 1995년 드래프트 최대어로 기대받았던 것. 하지만.. 노정윤 선수와 남대식 당시 고려대 축구부 감독의 주선으로 곽경근은 입단 테스트 끝에 우라와레즈 행이 결정 되었고, 곽경근 선수는 드래프트 거부 선수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해외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아직 무릎 부상도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곽경근 선수는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장벽 속에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겉돌았고 결국 곽선수의 소속팀이었던 우라와레즈는 6개월여 만에 곽경근 선수를 방출하기로 결정한다. 앞서 드래프트 거부로 말미암아, 당분간 K리그 복귀가 불가능했던 상황. 하마터면 선수 은퇴까지 고려할뻔한 위기 상황 속에서 다행히 JFL 팀이었던 후쿠시마 FC와 입단 계약이 체결되면서 곽선수는 2년동안 후쿠시마에서 활약하게된다. 후쿠시마에서 2년간 도합 36골을 성공시키는 등 나름의 활약을 펼쳤으나 97시즌을 마지막으로 후쿠시마 FC가 해체되자 1998년 드래프트를 신청하며 K리그로 복귀하였다.


프로 생활[편집]

1998 K리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부천 SK에 입단해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이후 3년동안 2자리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부천 SK의 마지막 전성기를 지휘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02년 즈음부터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트나즈 트라판 감독 부임 후 부터는 부천팬들로부터 '공 낙하 지점도 제대로 못 잡는다'는 혹평을 듣기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2003 시즌을 마치고 김기동, 이임생 등과 FA로 풀리고 말았는데.. 이 때 부산 아이콘스는 이임생과 함께 곽경근 선수를 FA로 영입하는데 성공, 곽경근은 5년만에 팀 유니폼을 바꿔 입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산에서 이임생과 곽경근은 재앙으로 전락했다. 이임생은 그럭저럭 뛰었지만 1년 만에 선수 은퇴를 선언했고, 곽경근은 이안 포터필드의 신뢰 아래 꾸준히 센터 포워드로 출장했지만, 공격 위치를 잡는데 애를 먹으며 무득점의 나날을 보낸 것.. 결국 포터필드 감독은 곽경근을 센터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꾀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고, 곽선수는 센터백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2년간 부산에서 활동한 뒤 은퇴하였다. 나름 제 자리를 잡고 활약하다 은퇴한건 좋았지만, 골 넣어달라고 비싼 돈주고 데려왔는데 센터백으로 뛰고 있다고 당시 부산팬들의 불만은 상당했었다. 이후 수년 뒤 곽경근의 뒤를 잇는 선수가 등장한다...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차범근 축구교실의 한축을 이루고있는 여의도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2005년 부임해 활동하였다.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부천 FC 1995 vs 부천 FC OB와의 친선전에 선수 겸 감독으로 참가해 부천 FC 팬들의 환호를 받은바 있으며, 2011년 12월 16일 곽창규 감독을 대신해 부천 FC 1995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2013시즌을 앞두고 부천 FC 1995가 K리그 챌린지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곽경근 감독도 K리그 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쳐보이게 되었다.

13시즌 성적은 8승 9무 18패 45득 61실을 기록하며 8개팀 중 7위를 기록했는데, 부천팬들은 무색무취 전술이라며 불만을 제기했지만 임창균 등 젊은 선수를 육성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도 보여줬다는 상반된 평을 얻었다. 그런데.. 13시즌 종료 후, 2014년 드래프트에서 신인선수 선발과 관련해 각종 논란이 터져나오면서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2014년 1월 8일 경질을 당하고 말았다.[2] 이후 곽경근 전 감독 측은 구단의 일방적인 해임 결정에 무효확인 및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거두었다. 다만 구단 측의 사과만 받았을 뿐, 감독직에 복귀를 하지는 않기로 하였다고..[3] 이처럼 논란 속에 부천을 떠난 곽경근 감독은 자신의 유소년 축구클럽인 KKK FC 관리에 힘을 쏟다가 2017년 서울디지털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선임되며 오랜만에 근황을 알렸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에피소드[편집]

  • 은근히 리웨이펑 선수와 생김새가 닮았다. 특히 플레이시 사진은 더더욱.
  • 전반적으로 전성기가 너무 짧았고, 부상 관리를 제대로 못받아 아까운 재능을 썩혔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과거 니포축구 팬들은, 만약 곽경근이 1995년 드래프트를 거부하지 않고 좀 더 일찍 유공에 들어왔다면 '세르게이 - 곽경근 투톱에 윤정환이 패스를 찔러넣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으리라 상상하곤 했다. (물론 곽경근 선수가 95년 드래프트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유공이 아닌 다른팀에 갈 확률이 높았지만..)
  • 2003년 부산 아이콘스는 이민성, 우성용 팀내 핵심 선수를 이적시켜 번돈으로 노정윤, 이임생, 곽경근 부평고 3인방을 사오는데 모두 쏟아부었다. 결과적으로 부산 아이콘스는 이임생이 1년만에 은퇴, 공격하라고 데려온 곽경근의 최전방 수비수화 등으로 패망. ㅠㅠ.. 그나마 노정윤이 밥값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때의 이적을 진두지휘한 최만희 당시 부산 아이콘스 단장은 이후 이임생과 함께 수원 삼성으로 넘어갔고, 이 둘에 대해 부산팬들의 평가는 매우 좋지않다. 수원 삼성이 보낸 간첩이 아니었냐는 소리도 있었으니 말다했지.. 그런데 2017년 최만희 씨가 부산 아이파크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경력[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2012년에는 부천 FC 1995와 여의도고 축구부 감독을 겸직하였으나, 2013시즌부터는 부천 FC 1995 감독직만을 맡아 활동하였다.
  2. 관련 기사 : [1]
  3. 관련 기사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