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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양조'''(朝日釀造)는 일제시대 설립된 근대식 양조회사였다. 소주 판매로 인한 번영을 바탕으로 '''조일양조 축구단'''을 설립하여, 해방후 초기 한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 조일양조 ==
'''조일양조'''는 1919년 10월 12일 [[인천]] 선화동에 조선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기계식 양조회사였다.<ref>남한에서는 최초. 조선 최초의 양조회사는 1919년 6월 15일 평양 교구정에서 설립된 "조선소주"이다. 자본금 50만원에 사장은 일본인 사이토 히사타로(齋藤久太郎)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조회사는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설립된 진천양조상회이다. 현, 진로.</ref> 일본인 구기모토 토지로(釘本藤次郞) 등이 자본금은 100만원으로 설립하였으며, 소주의 상표는 금강표(金鋼表)였다. 1928년 설립된 소주양조업자연합회의 회장사가 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1940년대 이후 일제가 전쟁으로 인해 곡물 소비를 통제하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김기영이 인수하여 다시 공장이 가동되었으나, 결국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금 체납을 하게되어 공장이 차압되었으며, 1950년 6.25 사변을 전후하여 폐업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인천 선화동에 공장터가 남아있다.


== 조일양조 축구단 ==
조일양조 축구단은 1930년대 소주 생산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었던 조일양조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창단한 축구단이다. 축구단은 '''인천 조양, 조양''' 등으로 불리었으나, 이들이 조선인 주축의 축구단이었는지 일본인 주축의 축구팀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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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에는 [[조선전업]]과 함께 서울 지역권에서는 유이한 실업 축구팀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였으며, 16명의 최종 엔트리 중, 5명이 인천 조일양조 소속 선수가 지명되는 쾌거를 누렸다. 하지만 1950년 6.25 이후에는 조일양조가 폐업함에 따라 축구단도 자연히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 주요 선수 ==
[[이시동]], [[이유형]], [[배종호]], [[정국진]], [[오경환]] (이상,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표)


== 수상 기록 ==
*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우승 : 1946, 1947


== 홈구장 ==
1920,30년대 인천 지역의 체육대회 는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에서 벌어졌다고 하므로, 조일양조도 창단 초기부터 이곳에서 경기를 벌였을 개연성이 높다. 조일양조 공장터는 현 인천시 중구 도원동 뉴월드아파트 부근에 폐건물 2채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관리는 되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ref>블로그:디비딥의 인천스케치 [http://db0353.blog.me/10088580621 남한최초의 기계식 소주공장 -(주)조일양조] 참고</ref>. 특기할만한 것은,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예정되어있는 [[숭의축구전용구장]]이 조일양조 공장터에서 불과 2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건설중이란 점이다. 인천 축구의 과거와 현재가 같은 시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다니, 묘한 우연이라 하겠다.


== 같이 보기 ==
* [[실업축구]]


== 참고사항 ==
<references/>


[[분류:실업축구단]][[분류:해체된 축구단]][[분류: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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