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62년 4월 창단하여 운영했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최초의 지방(대구) 실업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팀이었다. 초기 이렇다할 실업팀이 없던 당시 군제대 선수들의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깃발꽂으면 되던 시대였던 셈. 특히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전국체전]] 우승.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우승. 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 우승. 도시대항축구제전 우승 등 실업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차태성]],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양성하던 제일모직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부로 해체를 선언하고 이듬해 5일 협회에 보고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3명 및 선수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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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모직 축구단'''은 제일모직이 62년 4월 창단하여 운영했던 축구단으로 모기업이 있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최초의 지방(대구) 실업팀으로 1970년 [[한국합판]] 축구단이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지방팀이었다. 초기 이렇다할 실업팀이 없던 당시 군제대 선수들의 영입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깃발꽂으면 되던 시대였던 셈. 특히 창단 이듬해인 1963년 [[전국체전]] 우승.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우승. 추계실업종합축구선수권 우승. 도시대항축구제전 우승 등 실업팀이 참가 가능한 대부분의 대회를 우승해버리면서 한국 실업축구계를 천하통일 해버렸던 바 있다. [[차태성]], [[문정식]], [[이이우]], [[박경화]] 등을 양성하던 제일모직은 1971년 섬유업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경영난을 이유로 그해 12월 31일부로 해체를 선언하고 이듬해 5일 협회에 보고하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연쇄 해체를 우려하여 부활을 요청하였으나<ref>실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 되어 3월에 [[한국합판]]이 해체되어 실업축구에 한동안 지방팀은 전무하게 되었다.</ref>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수단 3명 및 선수 16명 전원은 제일모직 사원으로 입사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