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편집 요약 없음
'''박건하''' (朴建夏, Park, Kun Ha, 1971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수원 삼성]]에서 줄곧 활약 후, 은퇴한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박건하''' (朴建夏, Park, Kun Ha, 1971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수원 삼성]]에서 줄곧 활약 후, 은퇴한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대표팀]] 코치로 선임되었다.
: 1996년 [[K리그 신인왕]] 수상
: 1996년 [[K리그 신인왕]] 수상
* 현재소속 : [[U-23]] 한국 올림픽대표팀 코치
* 현재소속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 [[등번호]] : 현역 시절 18번
* [[등번호]] : 현역 시절 18번
1996년의 화려한 신인 시절을 뒤로하고, 1997년 시즌 및 199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후 첫 리그 우승 시절에도 수원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97, 98 양시즌은 박건하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시즌이기도 하였다. 외국인 선수들의 등쌀에 밀려 주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던것. 설사 주전으로 나서도 골을 넣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짐으로 다가와 오히려 플레이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이처럼 2년간의 부진속에 신인 때 반짝한 공격수 정도로 묻힐뻔했던 박건하 선수는 1999시즌을 앞두고 [[김호]] 감독의 지원아래 절치부심, 99시즌 12골 6도움을 몰아치며 수원 삼성의 리그, 컵대회 전관왕 신화 달성에 주역으로 자리매김한다. 박건하 선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1996년의 화려한 신인 시절을 뒤로하고, 1997년 시즌 및 199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후 첫 리그 우승 시절에도 수원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97, 98 양시즌은 박건하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시즌이기도 하였다. 외국인 선수들의 등쌀에 밀려 주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던것. 설사 주전으로 나서도 골을 넣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짐으로 다가와 오히려 플레이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이처럼 2년간의 부진속에 신인 때 반짝한 공격수 정도로 묻힐뻔했던 박건하 선수는 1999시즌을 앞두고 [[김호]] 감독의 지원아래 절치부심, 99시즌 12골 6도움을 몰아치며 수원 삼성의 리그, 컵대회 전관왕 신화 달성에 주역으로 자리매김한다. 박건하 선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2000년에는 [[황선홍]]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샤샤2|샤샤 드라쿨리치]]와 함께 잠시 3개월동안 [[가시와 레이솔]]의 임대선수가 되었다 다시 복귀하였다. J리그에서는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채 후반기에 다시 돌아왔고, 후반기에 수원의 상승세에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2001년 박건하는 [[산드로]]에 밀려 주전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후반 교체출전으로 알토란 같은 골을 엮어내며, 팀의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와 [[아시아슈퍼컵]]의 우승을 일구어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2002년 포워드에서 디펜더로 전향하였다.
2002년 박건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김호]] 감독의 뜻이었다. 영리한 상황 판단에 이은 볼 전개 능력과 헤딩력이 좋은 박건하의 장점을 수비에서 활용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공격수와 수비수의 체감은 확실히 다른것이었고 박건하는 수비에서의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하지만, 시즌이 지나가면서 박건하는 어느정도 수비에 적응을 한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끔씩 코너킥 공격가담에서 벼락같은 슈팅으로 골을 넣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팀의 공격진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하면서 임시로 공격수로 뛰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수비력을 바탕으로 수원의 수비진을 책임졌다. 2004년 박건하는 [[무사]]와 함께 수비라인에서 맹활약 팀의 세번째 우승을 일구어 내었지만, 이듬해인 2005년 노쇠화 기미를 뚜렷하게 보이며, 수원의 10위 추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2006년부터 플레잉코치로 15경기를 뛴 박건하는 2007시즌이 끝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 292경기 그것도 수원이라는 한팀에서 올린 성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