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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이트 추가됨 ,  2014년 1월 14일 (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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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7월31일 신달수 회장이 해체를 발표한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들었지만 기존 구단의 견제와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면서 [[조영증]]을 비롯해서 우수 선수들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자 기존 구단의 텃새에 이골이 난 지방 실업구단들이 발을 뺀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했다.   
 
1979년 7월31일 신달수 회장이 해체를 발표한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들었지만 기존 구단의 견제와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면서 [[조영증]]을 비롯해서 우수 선수들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자 기존 구단의 텃새에 이골이 난 지방 실업구단들이 발을 뺀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했다.   
 
당시 같은지역의 [[금호산업 축구단|금호산업 축구단(구, 극동철강 축구단)]](부산)이 해체를 결정한지 한달만이어서 지방 실업축구는 큰 위기를 맞는다.  [[동양기계 축구단]](마산)이 있었지만 금호산업과 경남버스에는 전력이 크게 뒤쳐져 있었다.
 
당시 같은지역의 [[금호산업 축구단|금호산업 축구단(구, 극동철강 축구단)]](부산)이 해체를 결정한지 한달만이어서 지방 실업축구는 큰 위기를 맞는다.  [[동양기계 축구단]](마산)이 있었지만 금호산업과 경남버스에는 전력이 크게 뒤쳐져 있었다.
결국  8월 9일 경남버스 측이 축구단 해체 하면서 6개월만에 일수로 치면 거의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만에 경남버스 축구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선수단만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버렸는데 당시 대부분의 실업팀이 경기가 극히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구 경남버스 선수들은 그길로 은퇴하고 말았다. 심지어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박병철]] 선수도 이때 하마터면 은퇴할뻔했으나 다행히 홍콩 세미프로 축구팀과 계약이 맺어지면서 홍콩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1984년 [[슈퍼리그]]에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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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8월 9일 경남버스 측이 축구단 해체를  강행하면서 6개월만에 일수로 치면 거의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만에 경남버스 축구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선수단만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버렸는데 당시 대부분의 실업팀이 경기가 극히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구 경남버스 선수들은 그길로 은퇴하고 말았다. 심지어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박병철]] 선수도 이때 하마터면 은퇴할뻔했으나 다행히 홍콩 세미프로 축구팀과 계약이 맺어지면서 홍콩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1984년 [[슈퍼리그]]에 복귀하게 된다.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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