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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로 진학한 유병수는 2차례 [[피로골절]]로 인해 2007 U-20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긴 재활기간을 거치다 2학년 9월 추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회복하여 도움왕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대학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등 맹활약, 6골을 기록해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그 해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ref> 당시 홍익대학교에 유병수와 같이 재학 중이었던 선수는 [[한지호]], [[김성준]], [[김보경]], [[김원식]] 등이 있다.</ref> 하지만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겪었던 무릎 부상으로 인해 프로 [[스카우터]]들에게는 대학 최대어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능력은 좋은데 부상 위험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강원 FC]]는 우선지명 16명 보유권을 가졌음에도 유병수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 [[최순호]] 감독은 오히려 자신이 이끌던 [[울산 현대 미포조선]] 출신의 선수들을 대거 지명했다.
== 유소년 생활 ==
== 유소년 생활 ==
−[[대구신암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한 유병수는 이후 [[대구청구중학교]], [[수서중학교]]에 이어 [[서울둔천중학교]]에 입학,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매경기 1골씩 넣는 공격재능을 과시하였다. 둔천중 3학년이었던 2003년, 1992년 [[K리그 득점왕]] 출신이자 당시 [[대신고등학교]] 코치였던 [[임근재]] 감독이 유병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대신고로 스카우트하여 골 넣는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발리슛으로 골을 적게 넣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아이스크림 내기' 등을 통해 유병수의 골 감각을 키워나갔다. 이후 임근재 코치가 [[보인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자신을 이끌어 준 코치가 떠나자 유병수도 [[정종선]] 감독이 지휘하는 [[언남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언남고등학교]]에서 유병수는 자신의 기량을 대폭발 시켜보인다. 2005년 [[백록기고교축구대회]]에 출전한 유병수는 [[해트트릭]] 2회 포함 무려 12골을 쏟아부으면서 득점왕과 대회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하는 활약을 보였다. 팀은 비록 [[박현범]]이 이끄는 [[금호고등학교]]에게 4강에서 패배하여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병수는 이 대회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그 다음해인 2006년 다시 백록기에 서게 된 유병수는 6골을 기록하면서 2년 연속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도움왕에도 오르며 2관왕을 석권하였다. 또한 백록기대회 통산 18골로 개인통산최다득점자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 본 U-20 대표팀에 몇번 불려가면서 [[이청용]], [[기성용]], [[이상호]] 등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였다.
+[[대구신암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한 유병수는 이후 [[대구청구중학교]], [[수서중학교]]에 이어 [[서울둔천중학교]]에 입학,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매경기 1골씩 넣는 공격 재능을 과시하였다. 둔천중 3학년이었던 2003년, 1992년 [[K리그 득점왕]] 출신이자 당시 [[대신고등학교]] 코치였던 [[임근재]] 감독이 유병수를 유심히 지켜보고 대신고로 스카우트하여 골 넣는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발리슛으로 골을 적게 넣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아이스크림 내기' 등을 통해 유병수의 골감각을 키워주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임근재 코치가 대신고를 떠나 [[보인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자, 유선수는 [[정종선]] 감독이 지휘하는 [[언남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언남고에서 유병수는 자신의 기량을 대폭발 시킨다. 2005년 [[백록기고교축구대회]]에 출전해 [[해트트릭]] 2회 포함 무려 12골을 쏟아부으면서 득점왕과 대회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하는 활약을 보였다.<ref>언남고는 이 대회에서 [[박현범]]이 이끄는 [[금호고등학교]]에게 4강에서 패배하여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병수는 이 대회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ref> 이듬해인 2006년 다시 백록기에 서게된 유병수는 6골을 기록하면서 2년 연속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도움왕에도 오르며 2관왕을 석권하였다. 또한 백록기대회에서만 개인통산 18골을 기록하며, 대회 사상 개인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 본 U-20 대표팀에 몇번 불려가면서 [[이청용]], [[기성용]], [[이상호]] 등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였다.
+언남고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로 진학한 유병수는 2차례 [[피로골절]]로 인해 청소년대표에서도 낙마하고 긴 재활 기간을 거치다 2학년이던 2008년 9월 [[추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도움왕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대학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등 맹활약, 6골을 기록해 대회 득점왕에 오른 뒤, [[2009년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ref>당시 홍익대학교에 유병수와 같이 재학 중이었던 선수는 [[한지호]], [[김성준]], [[김보경]], [[김원식]] 등이 있었다.</ref> 하지만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겪었던 무릎 부상으로 인해 프로팀 [[스카우터]]들은 유선수를 대학 최대어로 평가하지 않았다. 능력은 좋은데 부상 위험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당시 [[강원 FC]]는 드래프트장에서 16명을 우선지명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에도 유병수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ref>당시 [[최순호]] 감독은 자신의 애제자 격인 [[울산현대미포조선]] 출신 선수들을 지명하는데 4장을 사용했고, 나머지 12장은 대학 선수들을 뽑는데 사용했는데 모두 미드필더와 수비수, 골키퍼를 지명하는데 12장을 사용했다.</ref>
−== K리그 ==
== K리그 ==
−[[2009년 드래프트]]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에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하였다. [[2009년 K리그]] 개막경기에서 對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자신의 리그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린 유병수 선수는, 데뷔 시즌에만 14골을 쓸어담으며 K리그 판도를 발칵 뒤집었다. 예년같으면 이견의 여지없는 [[K리그 신인왕]] 수상자였을 것이나, 유독 대어급 신인(?)이 즐비했던 2009시즌 괴물 [[김영후]] 선수에게 밀리며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2010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도 없이 22골을 성공시키며 [[K리그 득점왕]] 수상하였으며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는 등, 유병수 선수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10년 4월 18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혼자 4골을 쓸어넣는 활약을 보였는데, 이는 2003시즌 [[울산 현대]]의 [[도도]] 선수가 [[광주 상무]]를 상대로 4골을 기록한 이래 7년만의 기록이다. 인천 선수로서 한경기 첫 4골을 기록한 선수도 유병수가 처음이다. 역대 5번째 20골 득점왕, 역대 최연소 20골 득점, 최연소 토종 득점왕, 역대 최고 경기당 득점왕 (0.79골) 등 K리그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중. 또한 축구전문지 '[[베스트일레븐]]'이 진행한 '2010 선수들의 선택, Player's Choice' 설문조사에서 광주를 제외한 K리그 14팀의 선수들로부터 26.6%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였다.
+[[2009년 드래프트]]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에 1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하였다. [[2009년 K리그]] 개막 경기에서 對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자신의 리그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린 유병수 선수는, 데뷔 시즌에만 14골을 쓸어담으며 K리그 판도를 발칵 뒤집었다. 예년같으면 이견의 여지없는 [[K리그 신인왕]] 수상자였을 것이나, 유독 대어급 신인(?)이 즐비했던 2009시즌 괴물 [[김영후]] 선수에게 밀리며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2010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도 없이 22골을 성공시키며 [[K리그 득점왕]] 수상하였으며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는 등, 유병수 선수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10년 4월 18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혼자 4골을 쓸어넣는 활약을 보였는데, 이는 2003시즌 [[울산 현대]]의 [[도도]] 선수가 [[광주 상무]]를 상대로 4골을 기록한 이래 7년만의 기록이다. 인천 선수로서 한경기 첫 4골을 기록한 선수도 유병수가 처음이다. 역대 5번째 20골 득점왕, 역대 최연소 20골 득점, 최연소 토종 득점왕, 역대 최고 경기당 득점왕 (0.79골) 등 K리그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중. 또한 축구전문지 '[[베스트일레븐]]'이 진행한 '2010 선수들의 선택, Player's Choice' 설문조사에서 광주를 제외한 K리그 14팀의 선수들로부터 26.6%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였다.
워낙 지난 2년간 활약도가 출중했기 때문인지 2011시즌에는 약간 득점 페이스가 주춤하자, 언론으로부터 [[슬럼프]]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했다. 문제는 저런 기자들의 개드립에 선수 본인이 압박감을 느낄수록 플레이가 망가질 수 있다는 것. 여기에 2011년 터진 K리그 승부조작에 유병수도 연관된것 아니냐는 괴소문이 돌아 유선수를 마인드적으로 더욱 괴롭혔다. 결국 유선수는 해외 진출을 모색한 끝에 2011년 7월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 FC와 3년계약을 맺고 이적료 150만 유로 (한화 약 23억원)에 중동행을 결정지었다.
워낙 지난 2년간 활약도가 출중했기 때문인지 2011시즌에는 약간 득점 페이스가 주춤하자, 언론으로부터 [[슬럼프]]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했다. 문제는 저런 기자들의 개드립에 선수 본인이 압박감을 느낄수록 플레이가 망가질 수 있다는 것. 여기에 2011년 터진 K리그 승부조작에 유병수도 연관된것 아니냐는 괴소문이 돌아 유선수를 마인드적으로 더욱 괴롭혔다. 결국 유선수는 해외 진출을 모색한 끝에 2011년 7월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 FC와 3년계약을 맺고 이적료 150만 유로 (한화 약 23억원)에 중동행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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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기그림|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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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리그 득점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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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아라비아''' {{국기그림|사우디아라비아}}
* '''사우디아라비아''' {{국기그림|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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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
== 에피소드 ==
−* 본래 2009년 9월, 해외 전지훈련에 참가해 對 오만과의 경기에 출전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루었으나, 이 경기가 [[A매치]]로 인정되지 않아 비공식 데뷔전으로 기록을 남겼다. 이후, 2010년 10월, 한일전에서 교체 투입되며 정식 [[A매치]] 데뷔전을 치루었다.
+* 본래 2009년 9월, 해외 전지훈련에 참가해 對 오만과의 경기에 출전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루었으나, 이 경기가 [[A매치]]로 인정되지 않아 비공식 데뷔전으로 기록을 남겼다. 이후, 2010년 10월, 한일전에서 교체 투입되며 정식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 자신이 데뷔한 09시즌 부산과의 첫경기에서 먼 프리킥 찬스에서 환상적인 무회전 프리킥을 시전한 이후 별명이 '월미도 호날두'가 되었다. 이 별명은 해외에서도 불리고 있으며, 알 힐랄 경기때 해설자가 '월미도 호날두'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첫 별명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정말. 맨시티와의 친선경기때도 영어 해설자가 '월미도 로날도'라고 소개했다. 세계에 월미도를 알리고 있는 진정한 월미도 홍보대사 유병수.
* 자신이 데뷔한 09시즌 부산과의 첫경기에서 먼 프리킥 찬스에서 환상적인 무회전 프리킥을 시전한 이후 별명이 '월미도 호날두'가 되었다. 이 별명은 해외에서도 불리고 있으며, 알 힐랄 경기때 해설자가 '월미도 호날두'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첫 별명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정말. 맨시티와의 친선경기때도 영어 해설자가 '월미도 로날도'라고 소개했다. 세계에 월미도를 알리고 있는 진정한 월미도 홍보대사 유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