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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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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프로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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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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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일화체프.jpg|180픽셀|섬네일|일화 시절 사리체프]]
 
[[File:일화체프.jpg|180픽셀|섬네일|일화 시절 사리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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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시즌이 끝난 뒤 사리체프는 당시 아르센 뱅거감독이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AS모나코와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지만, 이적시기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일화 천마가 사리체프에게 테스트 제의를 했고, 사리체프는 목동구장에서 다른 선수 둘과 함께 테스트를 받게된다. 자체 청백전에서 사리체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일화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ref>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체결하지 않고 구장에서 체결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가 없었다 </ref> 통역도 없었고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나라에서의 생활은 쉽지않은 도전이었다. 게다가 일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수비부분에서 막장을 달리는 수비 최악의 팀이었다. 91년 일화의 팀 실점은 무려 63실점, 리그에서 꼴찌였던 것. 이러한 온갖 악조건 속에서 샤리체프는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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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시즌이 끝난 뒤 사리체프는 당시 아르센 뱅거감독이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AS모나코와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지만, 이적시기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일화 천마가 사리체프에게 테스트 제의를 했고, 사리체프는 목동구장에서 다른 선수 둘과 함께 테스트를 받게된다. 자체 청백전에서 사리체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일화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ref>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체결하지 않고 구장에서 체결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가 없었다 </ref> 통역도 없었고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나라에서의 생활은 쉽지않은 도전이었다. 게다가 일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수비부분에서 막장을 달리는 수비 최악의 팀이었다. 91년 일화의 팀 실점은 무려 63실점, 리그에서 꼴찌였던 것. 이러한 온갖 악조건 속에서 사리체프는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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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감독은 이전까지 일화의 주전 GK였던 [[김영호]]를 제쳐두고 사리체프를 기용했고,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다. 92년 사리체프는 40경기에 출장해 32실점을 마크하며 첫 시즌만에 0점대 방어율을 정복해버리더니, 93년 35경기 33실점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94년 36경기 33실점으로 3년째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더니, 95년에는 35경기에 실점은 단 27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에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다.<ref> 이러한 업적은 사리체프 혼자만이 아니라 [[안익수]], [[박광현]], [[겐나디]] 등을 필두로 한 수비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지만.. 92시즌부터 94시즌까지 일화의 성적은 거의 샤리체프의 공으로 일궈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화의 최강 수비라인은 95시즌에 가서야 완성되었기 때문..</ref> 결국 이 여파로 국내 다른 구단들이 앞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고, <ref> 대표적인 예로 부천의 [[샤샤1|샤샤]], 전북의 [[알렉세이]], 수원의 [[헨릭]], 포항의 [[드라간]]등이 있었다. </ref>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는 좁아졌다.<ref> 국내 골키퍼 가운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현대의 [[김병지]]와 LG의 [[김봉수]]가 전부였다. 이렇다보니 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골키퍼가 국가대표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고, 이것은 94 월드컵 [[최인영]]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 [[차상광]]의 알까기로 이어졌다. </ref> 결국 고심 끝에 연맹은 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사리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쿼터 첫해인 1996년 27경기 51실점으로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97년에는 16경기 27실점, 외국인 골키퍼가 사리체프 단 한명이었던 98년에는 단 5경기에 나와 16실점을 기록하며 추락. 98시즌이 끝난 뒤 천안에서 방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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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감독은 이전까지 일화의 주전 GK였던 [[김영호]]를 제쳐두고 사리체프를 기용했고,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다. 92년 사리체프는 40경기에 출장해 32실점을 마크하며 첫 시즌만에 0점대 방어율을 정복해버리더니, 93년 35경기 33실점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94년 36경기 33실점으로 3년째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더니, 95년에는 35경기에 실점은 단 27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에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다.<ref> 이러한 업적은 사리체프 만이 아니라 [[안익수]], [[박광현]], [[겐나디]] 등을 필두로 한 당대 최강의 일화 수비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지만.. 92시즌부터 94시즌까지 일화의 성적은 거의 사리체프의 공으로 일궈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위의 최강 수비 라인은 95시즌에 가서야 완성되었기 때문..</ref> 결국 이 여파로 일화 뿐만 아니라 다른 K리그 구단들도 앞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고,<ref> 대표적인 예로 부천의 [[샤샤1|샤샤]], 전북의 [[알렉세이]], 수원의 [[헨릭]], 포항의 [[드라간]]등이 있었다. </ref>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는 좁아졌다.<ref>92년부터 94년까지 일화 천마의 3연패 직후인 1995시즌 기준, 주전 골키퍼가 한국 선수인 K리그 팀은 [[울산 현대 호랑이]] ([[김병지]])[[LG 치타스]]([[김봉수]])가 전부였다. 나머지 팀들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는 [[일리치]]ㆍ[[포항제철 아톰스]]는 [[드라간]]ㆍ[[부천 유공]]은 [[샤샤]]ㆍ[[전북 다이노스]]는 후반기 영입된 [[알렉세이]]가 1선발을 곧바로 꿰찼고, [[전남 드래곤즈]]는 [[94년 월드컵 대표]]였던 [[박철우]]를 1.5선발로 밀어내고 [[유리쉬쉬킨]]의 출장 수가 제일 많았다. 이렇다보니 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골키퍼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고, 마침 94 월드컵 [[최인영]]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 [[차상광]]의 알까기로 국내 골키퍼 실력 퇴보를 걱정하던 축구계에 골키퍼 쿼터 규제라는 특단의 조치를 꺼내게 만드는 배경을 작용한다.</ref> 결국 고심 끝에 연맹은 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사리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쿼터 첫해인 1996년 27경기 51실점으로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97년에는 16경기 27실점, 외국인 골키퍼가 사리체프 단 한명이었던 98년에는 단 5경기에 나와 16실점을 기록하며 추락. 98시즌이 끝난 뒤 천안에서 방출되었다.
       
== 안양 LG 시절 ==  
 
== 안양 LG 시절 ==  
천안에서 내쫓기듯 방출된 사리체프에게 손을 내민건 안양 LG였다. 당시 안양은 수비불안으로 하위권을 전전하던 상황이었고, 이에 특단의 조치로 사리체프를 영입하게 되는데 99년 연맹이 '''K리그 외국인 골키퍼 보유 및 출전 금지''' 조항을 발동함에 따라 골키퍼 코치라는 꼼수(?)로 바꿔서 영입하게 되었다. 안양은 사리체프 코치를 통해 수비 안정화를 꾀했지만, 초보 코치였던 사리체프는 안양의 수비를 바꾸지 못했다. 당시 안양의 골키퍼 [[김봉수]]와 [[임종국]]은 하나같이 불안한 모습을 연출했고, 결국 안양은 10개팀 중 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2000시즌 안양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사리체프를 한국으로 귀화시킨것이었다. 한국을 좋아하던 사리체프도 귀화에 OK를 택했고, 구리 신씨를 시조로해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ref>신의손은 일화에서 활약할 당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는데 그 별명이 나쁘지 않았던 신의손은 이를 택했다는 후문이다.</ref> 2000년 사리체프는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당시 축구인들은 훈련한지 10일도 안된 신의손이 성공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신의손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갔다. 2000년 32경기 35실점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1년 35경기 29실점으로 다시한번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세월은 거스를 수 없었는지 2003시즌 18경기 26실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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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서 내쫓기듯 방출된 사리체프에게 손을 내민건 안양 LG 치타스였다. 당시 안양은 수비 불안으로 하위권을 전전하던 상황이었고, 이에 특단의 조치로 사리체프를 영입하게 되는데 99년 연맹이 '''K리그 외국인 골키퍼 보유 및 출전 금지''' 조항을 발동함에 따라 골키퍼 코치라는 꼼수(?)로 바꿔서 영입하게 되었다. 안양은 사리체프 코치를 통해 수비 안정화를 꾀했지만, 초보 코치였던 사리체프는 안양의 수비를 바꾸지 못했다. 당시 안양의 골키퍼 [[김봉수]]와 [[임종국]]은 하나같이 불안한 모습을 연출했고, 결국 안양은 10개팀 중 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에 2000시즌 안양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사리체프를 한국으로 귀화시킨 것이었다. 한국을 좋아하던 사리체프도 귀화에 OK를 택했고, 구리 신씨를 시조로해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ref>신의손은 일화에서 활약할 당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는데 그 별명이 나쁘지 않았던 신의손은 이를 택했다는 후문이다.</ref> 2000년 사리체프는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당시 축구인들은 훈련한지 10일도 안된 신의손이 성공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신의손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갔다. 2000년 32경기 35실점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1년 35경기 29실점으로 다시한번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세월은 거스를 수 없었는지 2003시즌 18경기 26실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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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그 로컬룰까지 뜯어고칠 정도로 K리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지만,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K리그 시즌 MVP]]는 물론 K리그 공로상이나 특별상도 받은적이 없다. K리그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라 할만할듯. (이는 [[라데]] 선수도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활약에도 불구 K리그 시즌 MVP를 수상하지 못했다.)
 
* 리그 로컬룰까지 뜯어고칠 정도로 K리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지만,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K리그 시즌 MVP]]는 물론 K리그 공로상이나 특별상도 받은적이 없다. K리그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라 할만할듯. (이는 [[라데]] 선수도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활약에도 불구 K리그 시즌 MVP를 수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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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천마 입단 당시, 러시아에서 가족들도 모두 데려와 한국에 정착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한국 소재 외국인학교에 보내야했는데.. 외국인학교는 워낙 학비가 비쌋던 탓에 그냥 한국에 위치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켜버렸다..; 한국어 하나 모르는 애들을 -0- .. 다행히 아이들은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지금은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ref>물론 샤리체프도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ref> 다만 현재 샤리체프 부인은 러시아로 돌아가고 자녀들은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 유학을 간 상태라고.<ref>참고기사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70661&date=20111216&page=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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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천마 입단 당시, 러시아에서 가족들도 모두 데려와 한국에 정착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한국 소재 외국인학교에 보내야했는데.. 외국인학교는 워낙 학비가 비쌋던 탓에 그냥 한국에 위치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켜버렸다..; 한국어 하나 모르는 애들을 -0- .. 다행히 아이들은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지금은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ref>물론 사리체프도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ref> 다만 현재 사리체프 부인은 러시아로 돌아가고 자녀들은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 유학을 간 상태라고.<ref>참고기사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70661&date=20111216&page=1</ref>
       
==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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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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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960년생]][[분류: 타지키스탄 국적의 선수]][[분류:일화 천마의 선수]][[분류: 천안 일화 천마의 선수]][[분류: 안양 LG 치타스의 선수]][[분류: 귀화선수]][[분류: 전설적인 선수]][[분류:경남 FC의 지도자]][[분류:여자축구 지도자]][[분류: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지도자]][[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지도자]]
 
[[분류: 1960년생]][[분류: 타지키스탄 국적의 선수]][[분류:일화 천마의 선수]][[분류: 천안 일화 천마의 선수]][[분류: 안양 LG 치타스의 선수]][[분류: 귀화선수]][[분류: 전설적인 선수]][[분류:경남 FC의 지도자]][[분류:여자축구 지도자]][[분류: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지도자]][[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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