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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산(K리그) ||클래식||-||253||23||2||3||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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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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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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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시절 ==  
 
== 포항 시절 ==  
하지만 1996년 안익수는 버려졌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이었고, 천안 일화는 나이 든 수비수를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포항 아톰즈]]로 트레이드를 시켜버렸던 것.<REF> 이는 박종환 감독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트레이드가 진행된 것이었고, 이에 격분한 박종환 감독은 스스로 천안의 감독직을 그만두고 말았다 </REF> 하지만, 포항에서 박성화 감독의 지원아래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갔다. 이적 첫해 30경기에 출전하면서 팀의 [[FA컵]] 우승에 큰 공헌을 했고, 1997년에는 포항의 [[아시아클럽축구선수권대회]] (현 [[AFC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의 우승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한 안익수는 포항에서 젊은 선수들에게 프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 맏형으로써의 리더쉽을 보여주었고<ref>특히 당시 포항에 갓 입단했던 [[이싸빅]] 선수도 안익수 선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고..</ref> 이는 포항 스틸러스의 약진에 큰 힘이 되었다. 1998년 시즌이 끝난 직후 은퇴를 선언하였고, 9년간의 K리그 생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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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6년 안익수는 버려졌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이었고, 천안 일화는 나이 든 수비수를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포항 아톰즈]]로 트레이드를 시켜버렸던 것.<REF> 이는 박종환 감독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트레이드가 진행된 것이었고, 이에 격분한 박종환 감독은 스스로 천안의 감독직을 그만두고 말았다 </REF> 하지만, 포항에서 박성화 감독의 지원 아래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갔다. 이적 첫해 30경기에 출전하면서 팀의 [[FA컵]] 우승에 큰 공헌을 했고, 1997년에는 포항의 [[아시아클럽축구선수권대회]] (현 [[AFC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의 우승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한 안익수는 포항에서 젊은 선수들에게 프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 맏형으로써의 리더쉽을 보여주었고<ref>특히 당시 포항에 갓 입단했던 [[이싸빅]] 선수도 안익수 선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고..</ref> 이는 포항 스틸러스의 약진에 큰 힘이 되었다. 1998년 시즌이 끝난 직후 은퇴를 선언하였고, 9년간의 K리그 생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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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비수로서 프로 통산 200경기 이상 출장하면서도 퇴장은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본인은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을 해하는 플레이보단 기술적인 플레이를 중시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기술 좋은 수비수들을 많이 키워냈다.
 
* 수비수로서 프로 통산 200경기 이상 출장하면서도 퇴장은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본인은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을 해하는 플레이보단 기술적인 플레이를 중시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기술 좋은 수비수들을 많이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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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커리어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GS 수석코치 시절 멘탈레기인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모조리 뜯어고친 일화이다. <ref> 대표적인 예로 [[김진규]] </ref> 5년간 그 어떤 코치는 물론이고 감독들도 해내지 못한 것을 반년만에 이루어냈다. <ref>하지만 감독이 된 이후로는 얄짤없다. 맘에 안들면 다 아웃 [[김성환]]이 대표적인 예. 지각 한번으로 이적당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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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커리어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GS 수석코치 시절 GS 선수들의 안이한 정신 상태를 바로잡은 것으로 꼽힌다. 지난 5년간 그 어떤 코치는 물론이고 감독들도 해내지 못한 것을 반년 만에 이뤄냈고 이것이 빙가다 감독의 데뷔 시즌 K리그 우승 달성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여자 클럽팀 최초로 클럽하우스를 건립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 영어교육을 의무화 하였다. 게다가 일화 시절 동료였던 [[신의손]]을 골키퍼 코치로 선임하는 등 여자 축구클럽의 선진화에 기여하였다.  
 
*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여자 클럽팀 최초로 클럽하우스를 건립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 영어교육을 의무화 하였다. 게다가 일화 시절 동료였던 [[신의손]]을 골키퍼 코치로 선임하는 등 여자 축구클럽의 선진화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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