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거나 타 구단으로 이적해 버리며 24명의 선수단이 존재했지만 팀은 대학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그나마 팀이 안 엎어지고 K리그에 참가한데 감지덕지하며 [[김기복]] 감독의 지휘아래 [[1994년 K리그]]에 참가하였지만 팀 지원은 완산 푸마 때보다 별반 나아진게 없었다. 김기복 감독은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시간보다 돈빌리러 다니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고, 전북 버팔로 형편을 취재하러 간 기자에게 김기복 감독이 통사정해 돈을 꾸어서 선수단 밥값을 해결(?)하는 등 전설같은 일화를 남겼다. 결국 문수기 구단주는 힘에 부치면서 버팔로 운영을 포기했고 1994년 9월6일 이사회에서 팀 해체를 전제로 한 연맹의 한시적 직영운영이 결정되었다. 1994년 11월 [[일화 천마]]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고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협력업체 현양이 10억원을 출자하고 현대자동차를 홍보 스폰서로 20억원을 후원하여, 독립법인체 [[전북 다이노스]]를 재창단 함에 따라 전북 버팔로는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전북 버팔로 축구단의 [[백송]], [[김경래]] 등 몇몇 선수는 재창단한 전북 현대 다이노스와 계약을 맺으며 프로 생활을 이어갔으나 대다수의 선수는 1년도 안되는 짧은 프로 생활을 마치고 전북 버팔로와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 | 은퇴하거나 타 구단으로 이적해 버리며 24명의 선수단이 존재했지만 팀은 대학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그나마 팀이 안 엎어지고 K리그에 참가한데 감지덕지하며 [[김기복]] 감독의 지휘아래 [[1994년 K리그]]에 참가하였지만 팀 지원은 완산 푸마 때보다 별반 나아진게 없었다. 김기복 감독은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시간보다 돈빌리러 다니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고, 전북 버팔로 형편을 취재하러 간 기자에게 김기복 감독이 통사정해 돈을 꾸어서 선수단 밥값을 해결(?)하는 등 전설같은 일화를 남겼다. 결국 문수기 구단주는 힘에 부치면서 버팔로 운영을 포기했고 1994년 9월6일 이사회에서 팀 해체를 전제로 한 연맹의 한시적 직영운영이 결정되었다. 1994년 11월 [[일화 천마]]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고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협력업체 현양이 10억원을 출자하고 현대자동차를 홍보 스폰서로 20억원을 후원하여, 독립법인체 [[전북 다이노스]]를 재창단 함에 따라 전북 버팔로는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전북 버팔로 축구단의 [[백송]], [[김경래]] 등 몇몇 선수는 재창단한 전북 현대 다이노스와 계약을 맺으며 프로 생활을 이어갔으나 대다수의 선수는 1년도 안되는 짧은 프로 생활을 마치고 전북 버팔로와 운명을 같이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