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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준우승팀인 중앙고보 수비수였던 채만식은 풍자소설가로 유명한 채만식 씨이다. 중앙고보 시절까지 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문학, 스포츠, 예술을 아우르는 팔방미인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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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축구대회'''(全朝鮮蹴球大會)는 1921년부터 개최되어 1940년까지 총 21회 개최<ref>1922년에는 대회가 2번(2회,3회) 개최되었다.</ref>되었던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정규 축구대회이다.
'''전조선축구대회'''(全朝鮮蹴球大會)는 1921년부터 개최되어 1940년까지 총 21회 개최<ref>1922년에는 대회가 2번(2회/3회) 개최되었다.</ref>되었던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정규 축구대회이다.
이후 '''전조선종합경기대회'''<ref>오늘날 전국체전 격인 전조선종합경기대회 내 종목으로 편입되었던 것.</ref>,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이후 '''전조선종합경기대회'''<ref>오늘날 전국체전 격인 전조선종합경기대회 내 종목으로 편입되었던 것.</ref>,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 역사 ==
== 역사 ==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발족한 후, 사상 최초의 전국규모 체육대회인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한 경험을 발판 삼아, 이듬해인 1921년 2월 11일 부터 13일까지 '''전조선축구대회'''가 개회하였다. 2월이라는 축구대회를 개최하기엔 다소 이른 시기를 날짜로 잡은 것은 대회 마지막날인 2월 13일이 정월대보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축구대회에 관심을 가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고, 조선체육회 내부 인사들도 축구대회 개최를 강력히 주창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20년 7월 발족한 [[조선체육회]]는 한반도 최초의 전국 규모 체육 대회였던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한 경험을 발판 삼아, 이듬해인 1921년 2월 11일 부터 13일까지 '''전조선축구대회'''가 개회하였다. 2월이라는 축구 대회를 개최하기엔 다소 이른 시기를 날짜로 잡은 것은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13일이 정월대보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축구대회에 관심을 가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고, 조선체육회 내부 인사들도 한시라도 빨리 축구 대회를 개최하자고 강력히 주창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21년 제 1회 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정식 축구경기 규칙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큰데, 당시 일어로 번역된 축구경기규칙을 다시 한역으로 번역하여 선수단과 심판진들에게 나누어준 후 숙지시켰다고 한다. 이외에도 입장료도 처음으로 책정하여 사상 첫 정규 유료 축구 경기대회로도 기록되었다. (어른 20전, 아이 10전) 1934년까지 연중행사로 계속되어온 전조선축구대회는 1934년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전국체전]]의 전신) 참가 종목으로 흡수되었다가 1938년 [[조선체육회]] 해체뒤, 축구 종목만을 [[조선축구협회]]가 인수하여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 라는 명칭으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오다 1941년 예정되었던 제 22회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을 개최 포기하면서 전조선축구대회는 폐지되게 되었다.
1921년 제 1회 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정식 축구 경기 규칙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큰데, 당시 일본어로 번역된 축구 경기 규칙을 다시 한역으로 번역하여 선수단과 심판진들에게 나누어준 후 숙지시켰다고 한다. 이외에도 입장료도 처음으로 책정하여 사상 첫 정규 유료 축구 경기 대회로도 기록되었다. (어른 20전, 아이 10전) 이처럼 1회 대회를 성료한 뒤에는 1934년까지 연중 행사로 계속되며 자리를 잡은 전조선축구대회는 1934년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전국체전]]의 전신) 참가 종목으로 흡수되었다가 1938년 [[조선체육회]]의 해체 뒤, 축구 종목만을 [[조선축구협회]]가 인수하여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 라는 명칭으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갔으나, 1941년 예정되었던 제 22회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을 개최 포기되었고 이어 구기 종목 대회가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자연스레 전조선축구대회는 폐지되게 되었다.
이후, 광복 후에 [[조선축구협회]]가 재건됨에 따라 전조선축구대회의 뒤를 잇는 [[전국 축구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동 대회는 오늘날 [[FA컵]]으로 계승되며 한국 축구의 정규 축구대회의 근간을 다지고 있다.
다행히 전조선축구대회는 이후 명맥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으며, 1945년 광복 후 [[조선축구협회]]가 재건 됨에 따라 전조선축구대회의 뒤를 잇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동 대회는 오늘날 [[FA컵]]으로 계승되며 한국 축구의 정규 축구대회의 근간을 다지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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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grou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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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
== 에피소드 ==
*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한국축구 역사상 최초의 정규대회였기 때문에 공인(?)된 [[심판]]이 경기를 주관한 첫번째 대회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대회 심판은 한국축구 1호심판으로 알려진 [[서병희]] 씨가 맡았으며, 선수들에게는 일본 [[아사히신문|아사히신문사]]에서 제작한 축구규칙을 급히 한역해 나누어주어 규칙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급히 추진되는 통에 혼선이 잦았고, 이게 파울이냐 아니냐로 매경기마다 멱살잡이가 일어났다는 후문. 결국 1회 대회는 결승전도 못해보고 중단되고 말았다. 딴게아니라 규칙 때문에 서로 경기 더러워서 안해먹겠다고 선수단을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정규 대회였기 때문에 공인(?)된 [[심판]]이 경기를 주관한 첫번째 대회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대회 심판은 한국 축구 1호 심판으로 알려진 [[서병희]] 씨가 맡았으며, 선수들에게는 일본 [[아사히신문|아사히신문사]]에서 제작한 축구 규칙을 급히 한역해 나누어주어 규칙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급히 추진되는 통에 혼선이 잦았고, 이게 파울이냐 아니냐로 매 경기마다 멱살잡이가 일어났다는 후문. 결국 1회 대회는 결승전도 못해보고 중단되고 말았다. 중단 사유는 다른게 아니라 축구 규칙 때문에 혼선이 극에 달한 끝에 양 팀이 경기를 더 이상 못하겠다며 선수단을 철수시켰기 때문이었다..
*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중등부 준우승팀인 중앙고보 수비수에 이름을 올린 채만식 씨는, 풍자 소설가로 세간에 유명한 채만식 씨가 맞다. 중앙고보 시절까지 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문학, 스포츠, 예술을 아우르는 팔방미인이셨다고..
== 같이보기 ==
== 같이 보기 ==
* [[전조선축구대회 (동음이의)]]
* [[전조선축구대회 (동음이의)]]
* [[전국축구선수권]]
* [[전국축구선수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