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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승]] || [[특무대]] || 생존<ref>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이후로 생존여부가 분명치않음 자세한건 추가바람. [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27&newsid=20090410164806708&p=SpoSeoul]</ref>
| [[박재승]]<ref>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27&newsid=20090410164806708&p=SpoSeoul] 이후로 생존 여부가 분명치않은데, 2015년 아시안컵을 앞두고 AFC는 아래 박경호 옹을 1회 아시안컵 대회 우승 멤버 중 유일한 생존자라 소개했다하니, 2009년 ~ 2015년 사이에 돌아가신듯 하다. 자세한건 링크 참고 [http://sports.hankooki.com/lpage/soccer/201501/sp2015012909175698040.htm]</ref> || [[특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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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창기]] || [[조선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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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소속팀은 2012년 8월 1일 기준입니다.
※ 현 소속팀은 2018년 12월 1일 기준입니다.
== 본선 ==
== 본선 ==
=== 참가 과정 ===
=== 참가 과정 ===
독립한지 10년이 채되지 신생 독립국,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의 첫 국제 대회 참가였던지라 한국 대표팀은 본선 티켓을 따냈음에도 본선이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는 것부터 온갖 고초를 겪어야했다. 총 22명의 한국 선수단은 1954년 6월 10일, 스위스 월드컵 출정을 위해 여의도비행장<ref>당시는 서울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다. 지금의 김포로 공항이 옮겨진건 1958년 이후의 일.</ref>을 출발해 일본 도쿄 하네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네다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공항편을 쉽게 구할 수 없던데다 현지사정도 밝지 못했던 대표팀은 하네다공항에서 4일동안 발이 묶인채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간신히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항공편을 구해 6월 13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하였고,<ref>당시 6월 13일 표도 20장만을 구해 22명인 대표팀이 타기엔 좌석수가 모자랐으나,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해줘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ref> 하네다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 인도 캘커타, 파키스탄 카라치, 시리아,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대여정 끝에 하네다 출발 64시간 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립한지 갓 10년이 못된 신생 독립국,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의 첫 국제 대회 참가였던지라 한국 대표팀은 본선 티켓을 따냈음에도 본선이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는 것부터 온갖 고초를 겪어야했다. 총 22명의 한국 선수단은 1954년 6월 10일, 스위스 월드컵 출정을 위해 여의도비행장<ref>당시는 서울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다. 지금의 김포로 공항이 옮겨진건 1958년 이후의 일.</ref>을 출발해 일본 도쿄 하네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네다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공항편을 쉽게 구할 수 없던데다, 현지 사정도 밝지 못했던 대표팀은 하네다공항에서 4일동안 발이 묶인채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간신히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항공편을 구해 6월 13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하였고,<ref>당시 6월 13일 표도 20장 만을 구해 22명인 대표팀이 타기엔 좌석수가 모자랐으나,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해줘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ref> 하네다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 인도 캘커타, 파키스탄 카라치, 시리아,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대여정 끝에 하네다 출발 64시간 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는 6월 16일 이미 개막된 상태였고, 한국의 1차전 경기는 선수단이 도착한지 불과 15시간 뒤인 6월 17일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시차의 문제, 64시간동안의 여행피로 누적등을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로 대표팀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헝가리와의 일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를 회고한 김용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50여시간을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선수들의 양복바지가 모두 무릎위까지 말려올라가 취리히에 도착한 직후 선수들은 올라간 바지부터 내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만큼 선수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대회는 6월 16일 이미 개막된 상태였고, 한국의 1차전 경기는 선수단이 도착한지 불과 15시간 뒤인 6월 17일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시차의 문제, 64시간동안의 여행피로 누적등을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로 대표팀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헝가리와의 일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를 회고한 김용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50여시간을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선수들의 양복 바지가 모두 무릎위까지 말려올라가 취리히에 도착한 직후 선수들은 올라간 바지부터 내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만큼 선수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 [[1962년 FIFA 칠레 월드컵]] =
= [[1962년 FIFA 칠레 월드컵]] =
== 아시아 예선 ==
== 아시아 예선 ==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러낸다. 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이 예선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1차전 홈경기를 앞둔 [[효창운동장]]에 상대국 일본의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기 이전이었고 광복한지 15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기에 일장기를 함부로 걸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축구협회 측은 잔뜩 긴장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문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월드컵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이니 만큼 국가적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상대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일장기 게양을 촉구했고 체육계도 일장기 게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다만 문교부는 해당 경기를 승인했으나 일장기 게양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장문기]] 회장이 직접 장면 총리에게 허락을 받아낸 끝에 효창운동장에 일장기가 걸렸고 경기는 예정대로 1960년 11월 6일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수용 인원을 훨씬 초과한 4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15분 만에 [[문정식]] 선수가 왼쪽 쇄골을 부상당해 10명이 싸워야 했고, <ref>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ref> 전반 21분 사사키에게 선취골을 내줬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전반 39분과 41분에 [[특무대]] 소속이던 [[정순천]]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역전에 성공하였고, 더 이상 양팀의 득점이 나오지않아 2:1 대한민국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러낸다. 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이 예선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1차전 홈경기를 앞둔 [[효창운동장]]에 상대국 일본의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기 이전이었고 광복한지 15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기에 일장기를 함부로 걸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축구협회 측은 잔뜩 긴장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문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월드컵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이니 만큼 국가적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상대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일장기 게양을 촉구했고 체육계도 일장기 게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다만 문교부는 해당 경기를 승인했으나 일장기 게양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장문기]] 회장이 직접 장면 총리에게 허락을 받아낸 끝에 효창운동장에 일장기가 걸렸고 경기는 예정대로 1960년 11월 6일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수용 인원을 훨씬 초과한 4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15분 만에 [[문정식]] 선수가 왼쪽 쇄골을 부상당해 10명이 싸워야 했고, <ref>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ref> 전반 21분 사사키(Koji Sasaki)에게 선취골을 내줬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전반 39분과 41분에 [[특무대]] 소속이던 [[정순천]]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역전에 성공하였고, 더 이상 양팀의 득점이 나오지않아 2:1 대한민국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1961년 6월 11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진행된 예선 2차전에서도 한국팀은 시종일관 우세한 전력을 과시하며 전반 [[정순천]] 선수의 선취골과 후반 [[유판순]] 선수의 추가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두며 종합 전적 4:1의 스코어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이어서 1961년 6월 11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진행된 예선 2차전에서도 한국팀은 시종일관 우세한 전력을 과시하며 전반 [[정순천]] 선수의 선취골과 후반 [[유판순]] 선수의 추가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두며 종합 전적 4:1의 스코어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 예선 진행 ==
== 예선 진행 ==
한국 팀의 첫 상대는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던 멤버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으나, [[한일전]]이라는 특성과 홈 어드밴테이지를 등에 업은 한국 대표팀은 전반 8분여 만에 [[김기복]] 선수의 중거리 골로 선취 득점을 올리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도 집중력을 발휘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어냈고, 결국 난타전 끝에 2: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이어 2차전 상대는 호주. 한국 선수들은 호주는 반드시 잡아야 2라운드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며 공세를 펼쳤으나, 전반 38분경 Watkiss 선수의 중거리 슈팅을 [[손조명]] 선수가 펀칭하는데 실패해 어이없는 실점을 내준 뒤 기세가 꺽이며 1:2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벌어진 3차전 한일전. 여기서마저 이기지 못하면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탈락이 확정이었던터라 선수들은 집중력을 발휘해 달려들었고, [[정강지]] 선수가 일찌감치 2골을 쏟아넣으며 여유있게 승리를 챙겼다.
한국 팀의 첫 상대는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던 멤버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으나, [[한일전]]이라는 특성과 홈 어드밴테이지를 등에 업은 한국 대표팀은 전반 8분여 만에 [[김기복]] 선수의 중거리 골로 선취 득점을 올리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도 집중력을 발휘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어냈고, 결국 난타전 끝에 2: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이어 2차전 상대는 호주. 한국 선수들은 호주는 반드시 잡아야 2라운드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며 공세를 펼쳤으나, 전반 38분경 Johnny Watkiss 선수의 중거리 슈팅을 [[손조명]] 선수가 펀칭하는데 실패해 어이없는 실점을 내준 뒤 기세가 꺽이며 1:2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벌어진 3차전 한일전. 여기서마저 이기지 못하면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탈락이 확정이었던터라 선수들은 집중력을 발휘해 달려들었고, [[정강지]] 선수가 일찌감치 2골을 쏟아넣으며 여유있게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 4차전 호주와의 경기. 당시 일본은 2무 2패로 일찌감치 탈락한 상황이었고, 한국은 1승 1무 1패로 승점 3점, 호주는 2승 1무로 승점 5점이었다. 한국이 2골차 이상으로만 이긴다면 재경기 내지 호주를 밀어내고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상황. 이에 선수들도 집중력을 가지고 경기에 나섰고, 전반 30분께 [[박수일]] 선수가 [[이회택]]의 패스를 받아 골을 성공시키자 관중들도 선수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호주도 곧바로 반격에 나서, 후반 15분께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1:1 원점으로 만들었는데.. 후반 20분경 이회택 선수가 [[PK]]를 얻어내며 경기장 분위기는 다시금 흥분 상태로 변했다. 이 때 한국의 키커로 나온 이가 [[임국찬]]. 하지만 임선수는 호주 GK와의 수싸움에서 당해 PK를 성공시키지 못했고, 그대로 경기는 1:1로 종료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은 1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호주에게 2라운드 진출권을 내주고 월드컵 도전을 끝냈다.
그리고 마지막 4차전 호주와의 경기. 당시 일본은 2무 2패로 일찌감치 탈락한 상황이었고, 한국은 1승 1무 1패로 승점 3점, 호주는 2승 1무로 승점 5점이었다. 한국이 2골차 이상으로만 이긴다면 재경기 내지 호주를 밀어내고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상황. 이에 선수들도 집중력을 가지고 경기에 나섰고, 전반 30분께 [[박수일]] 선수가 [[이회택]]의 패스를 받아 골을 성공시키자 관중들도 선수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호주도 곧바로 반격에 나서, 후반 15분께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1:1 원점으로 만들었는데.. 후반 20분경 이회택 선수가 [[PK]]를 얻어내며 경기장 분위기는 다시금 흥분 상태로 변했다. 이 때 한국의 키커로 나온 이가 [[임국찬]]. 하지만 임선수는 호주 GK와의 수싸움에서 당해 PK를 성공시키지 못했고, 그대로 경기는 1:1로 종료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은 1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호주에게 2라운드 진출권을 내주고 월드컵 도전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