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도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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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도전사대한민국이 1954년 이후 현재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기 위해 치렀던 월드컵 아시아예선 빛 본선 경기들을 요약ㆍ기록한 문서입니다.


1954년 FIFA 스위스 월드컵[편집]

아시아 예선[편집]

파일:1954극동.jpg
극동지역예선 경기을 앞두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모습. 월간축구 1972년 12월호에 게재된 최광석 씨 소장 사진이다.

첫 월드컵 본선 참가를 위해 한국 대표팀은 극동지역 예선전을 거쳐야만 했다. 이 때 한국의 예선 상대국은 일본 이었는데, 원칙적으로 FIFA의 규정에 따라 일본과의 예선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져야만 했다. 그러나 1954년이면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독립한지 불과 10년도 안되었던 시절이라, 일본 선수들이 한국땅에 들어와 경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심지어 한국 선수들이 일본에 가서 경기를 하는 것도 못마땅히 여길 정도였는데..[1] 자칫 지역예선이 한국의 기권으로 끝날 위기에서 재일대한체육회 신희 씨와 재일사업가 정건영 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적극 설득했고,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 이유형 씨는 반드시 일본을 이기고 돌아오겠다.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모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일본에서 2경기 모두 치른다'는 전제하에 예선전 참가 허가가 떨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사된 54년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은 1954년 3월 7일과 14일 도쿄 메이진진구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2] 극동지역 예선 1차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GK 홍덕영 / FB : 박규정, 이종갑 / HB : 이상의, 민병대, 강창기 / FW : 최광석, 성낙운, 최정민, 정남식, 박일갑을 출전시켰으며, 1차전에서 선취골을 일본에 내주긴했으나 한국팀은 5골을 퍼부으며 1차전을 5:1로 마무리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일본이 거칠게 경기를 진행하면서 김지성 선수의 이빨이 부러지는 등 사고가 있었으나 한국은 주눅들지 않으며 경기를 진행해 2:2 무승부로 1승 1무의 성적으로 극동지역 예선을 통과해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하는데 성공하였다.


아시아 예선 결과[편집]

1954년 월드컵 대표팀이 치른 아시아예선 결과는 이하와 같다.


본선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편집]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월드컵 대표팀의 본선 참가를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954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선발전을 거쳐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구성하였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jpg
당시 한국대표팀 선수들 사진 중 일부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김용식 KFA 작고
선수단
GK 홍덕영 조선방직 작고
함흥철 헌병사령부
FB 박규정 병참단
이종갑 특무대
박재승[3] 특무대
HB 이상의 조선방직
강창기 조선방직
민병대 특무대
한창화 특무대
김지성 특무대
주영광 해군
FW 박일갑 특무대
정남식 첩보대
이수남 특무대
성낙운 병참단
최영근 ?
최정민 특무대
이기주 ?
우상권 헌병사령부
정국진 해군

※ 현 소속팀은 2018년 12월 1일 기준입니다.


본선[편집]

참가 과정[편집]

독립한지 갓 10년이 못된 신생 독립국,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의 첫 국제 대회 참가였던지라 한국 대표팀은 본선 티켓을 따냈음에도 본선이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는 것부터 온갖 고초를 겪어야했다. 총 22명의 한국 선수단은 1954년 6월 10일, 스위스 월드컵 출정을 위해 여의도비행장[4]을 출발해 일본 도쿄 하네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네다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공항편을 쉽게 구할 수 없던데다, 현지 사정도 밝지 못했던 대표팀은 하네다공항에서 4일동안 발이 묶인채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간신히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항공편을 구해 6월 13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출발하였고,[5] 하네다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 인도 캘커타, 파키스탄 카라치, 시리아,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는 대여정 끝에 하네다 출발 64시간 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는 6월 16일 이미 개막된 상태였고, 한국의 1차전 경기는 선수단이 도착한지 불과 15시간 뒤인 6월 17일 오후 3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시차의 문제, 64시간동안의 여행피로 누적등을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로 대표팀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헝가리와의 일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를 회고한 김용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50여시간을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다보니 선수들의 양복 바지가 모두 무릎위까지 말려올라가 취리히에 도착한 직후 선수들은 올라간 바지부터 내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만큼 선수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1차전 (對 헝가리)[편집]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1.jpg
헝가리와의 경기를 앞두고 푸스카스와 악수를 나누는 한국팀 주장 주영광(우)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2.jpg
헝가리와의 경기 킥오프 직전 도열한 헝가리와 한국 대표팀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3.jpg
위 사진에서 한국대표팀 도열 부분을 좀 더 확대ㆍ화질 개선한 사진
파일:1954년 한국대표팀4.jpg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는 김용식 감독(좌)과 주장 주영광(우)

한국은 본선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본선 B조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B조 첫상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1953년에는 축구 종가를 자처하던 잉글랜드를 6:3과 7:1로 박살내버린 당대 최강 헝가리였다. 이런 헝가리를 상대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내세울건 악바리 정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만으로 모든걸 이겨내기엔 시차, 여행피로, 기후, 음식, 실력차까지 너무 많은 점이 헝가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6월 17일 취리히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팀은 전반 10분 동안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나[6] 작은대포 푸스카스 (푸슈카쉬)를 시작으로 헝가리의 득점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전반 4골을 실점하며 어떻게든 버티던 한국팀이었으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체력 고갈은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 도중 민병대, 최정민, 성낙운, 우상권, 강창기, 박일갑 등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 결국 필드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홍덕영 선수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아내야 했다.[7] 결국 헝가리는 손쉬운 상대 한국을 유린하며 후반 20여분을 남기고 4골을 몰아치며 9:0 완승을 챙겨갔다. 한국의 0:9 패배 였다.

비록 한국이 0:9로 패배하긴 했지만, 한국이 치욕적으로 못한 경기는 아니었다. 위에 예시로 들었듯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마저 1:7로 박살날 정도로 당대 헝가리는 세계최강의 팀이었다. 같은 대회인 1954년 월드컵 예선에서 서독은 헝가리에게 3:8 대패를 당했을 정도. 하지만 서독은 끝끝내 헝가리를 물리치며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즉, 한국은 악조건 속에서도 0:9로 헝가리에게 버텨냈으니 오히려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결과였다.[8]


2차전 (對 터키)[편집]


결과 요약[편집]


경기수 승리 무승부 패배 득점 실점 골득실 승점
틀:나라자료 헝가리 헝가리 2 2 0 0 17 3 +14 4
틀:나라자료 터키 터키 2 1 0 1 8 4 +4 2
독일 서독 2 1 0 1 7 9 -2 2
대한민국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 0승 2패로 조별 예선 4위 기록. 본선 탈락.


1958년 FIFA 스웨덴 월드컵[편집]

54년 월드컵에 이어 58년 월드컵 출전도 노리던 한국 대표팀이었으나, 아시아 예선 참가 신청서를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분실하는 사고가 발생[9] 아시아 예선도 참가하지 못한채 대회를 마무리 짓고 말았다.


1962년 FIFA 칠레 월드컵[편집]

아시아 예선[편집]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러낸다. 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이 예선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1차전 홈경기를 앞둔 효창운동장에 상대국 일본의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기 이전이었고 광복한지 15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기에 일장기를 함부로 걸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축구협회 측은 잔뜩 긴장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문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월드컵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이니 만큼 국가적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상대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일장기 게양을 촉구했고 체육계도 일장기 게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다만 문교부는 해당 경기를 승인했으나 일장기 게양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장문기 회장이 직접 장면 총리에게 허락을 받아낸 끝에 효창운동장에 일장기가 걸렸고 경기는 예정대로 1960년 11월 6일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수용 인원을 훨씬 초과한 4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15분 만에 문정식 선수가 왼쪽 쇄골을 부상당해 10명이 싸워야 했고, [10] 전반 21분 사사키(Koji Sasaki)에게 선취골을 내줬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전반 39분과 41분에 특무대 소속이던 정순천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역전에 성공하였고, 더 이상 양팀의 득점이 나오지않아 2:1 대한민국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1961년 6월 11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진행된 예선 2차전에서도 한국팀은 시종일관 우세한 전력을 과시하며 전반 정순천 선수의 선취골과 후반 유판순 선수의 추가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두며 종합 전적 4:1의 스코어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아시아/유럽 P.O[편집]

파일:1962칠레PO.jpg
아시아/유럽 P.O 2차전에서 만회골을 성공시키는 유판순 선수.[11]
김규환 당시 대표팀 코치가 소장한 사진을 월간축구 1973년 4월호에 게재한 것이다.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북중미 예선 통과 팀들이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남미 or 유럽팀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러야만 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가 배정되었다. 그리하여 1961년 10월 8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로 떠났으며,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공산 국가에서 A매치를 치르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성과는 별개로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길은 위에서 언급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못지 않게 험난했고 대표팀의 준비도 열악했다. 40시간에 이르는 비행 끝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유고와 경기를 치러야했기 때문. 설상가상 당시 유고 대표팀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강호였다.[12]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대표팀은 전반 40분까지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Zvezdan Čebinac에게 42분경 선취골을 내준 뒤 0:1로 전반을 마쳤다. 그러나 전반전 최정민 선수가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 한국팀은 10:11의 싸움을 벌여야 했고 후반에 접어들면서 피로도가 급속도로 올라온 한국팀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경기 결과는 1:5 대패. 그나마 정순천 선수가 만회골을 터뜨린게 위안이었다.

이후 플레이오프 2차전은 동년 11월 26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는데 한국 선수들은 이미 승부가 갈렸다고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경기를 뛰었다. 결국 전반 초반 Milan Galić 선수에게 연거푸 2실점을 허용하며 또 무너지나 했는데.. 한국 선수들도 이대로 질 수는 없다며 심기를 다잡고 달려들었고, 후반 61분 유판순 선수가 만회골을 터뜨리며 1:2까지 쫒아가는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줬다.[13] 하지만 경기 종료 직전, Dražan Jerković 선수가 코너 플래그 근처에서 그림같은 중거리 골을 때려넣으며 경기는 1:3 패배로 종료되었다. 결국 종합 스코어 2:8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좌절되고 만다.


1966년 FIFA 잉글랜드 월드컵[편집]

1970년 FIFA 멕시코 월드컵[편집]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편집]

1970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은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예선 2라운드 다이렉트 진출권은 당시 아시아 최강자였던 이스라엘, 1966년 월드컵에서 8강행 기적을 써냈던 북한, 아프리카 국가들에게서 인종차별 정책을 이유로 따돌림당해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에 깍두기로 참가한 로다지아, OFC 소속인 뉴질랜드에게까지 총 4장이 주어진 반면, 아시아 내 전통의 강호 대한민국, 일본 및 OFC 대표 국가인 호주는 1라운드를 치러 상위 1개팀에만 2라운드 출전권을 부여하는 예선 일정을 짜냈던 것이다. 결국 한국, 일본, 호주 대표팀은 1장 밖에 없는 2라운드 티켓을 따내기 위해 1969년 10월 서울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1라운드 예선전을 치르게 된다.


예선 진행[편집]

한국 팀의 첫 상대는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던 멤버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으나, 한일전이라는 특성과 홈 어드밴테이지를 등에 업은 한국 대표팀은 전반 8분여 만에 김기복 선수의 중거리 골로 선취 득점을 올리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도 집중력을 발휘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어냈고, 결국 난타전 끝에 2: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이어 2차전 상대는 호주. 한국 선수들은 호주는 반드시 잡아야 2라운드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며 공세를 펼쳤으나, 전반 38분경 Johnny Watkiss 선수의 중거리 슈팅을 손조명 선수가 펀칭하는데 실패해 어이없는 실점을 내준 뒤 기세가 꺽이며 1:2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벌어진 3차전 한일전. 여기서마저 이기지 못하면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탈락이 확정이었던터라 선수들은 집중력을 발휘해 달려들었고, 정강지 선수가 일찌감치 2골을 쏟아넣으며 여유있게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 4차전 호주와의 경기. 당시 일본은 2무 2패로 일찌감치 탈락한 상황이었고, 한국은 1승 1무 1패로 승점 3점, 호주는 2승 1무로 승점 5점이었다. 한국이 2골차 이상으로만 이긴다면 재경기 내지 호주를 밀어내고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상황. 이에 선수들도 집중력을 가지고 경기에 나섰고, 전반 30분께 박수일 선수가 이회택의 패스를 받아 골을 성공시키자 관중들도 선수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호주도 곧바로 반격에 나서, 후반 15분께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1:1 원점으로 만들었는데.. 후반 20분경 이회택 선수가 PK를 얻어내며 경기장 분위기는 다시금 흥분 상태로 변했다. 이 때 한국의 키커로 나온 이가 임국찬. 하지만 임선수는 호주 GK와의 수싸움에서 당해 PK를 성공시키지 못했고, 그대로 경기는 1:1로 종료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은 1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호주에게 2라운드 진출권을 내주고 월드컵 도전을 끝냈다.


대표팀 명단[편집]

당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 대표팀 엔트리를 구성하였으니, 이는 아래와 같다.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단장 이상익 KFA
감독 김용식 KFA 작고
선수단
GK 이세연
손조명
FB 김정남
김호
서윤찬
조정수
HB 임국찬
최재모
최태열
홍인웅
김정석
손태호
FW 이회택
김기복
정병탁
박이천
정강지
최상철
홍경구
정규풍
이이우
박수일

※ 현 소속팀은 2018년 12월 1일 기준입니다.

1974년 FIFA 서독 월드컵[편집]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편집]

1974년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은 1970년의 경우보다 합리적으로 개편되었다. 우선 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을 A지역과 B지역으로 분류한 뒤 각기 A지역 예선 우승팀과 B지역 예선 우승팀이 홈&어웨이로 최종 결선을 치러 승리한 팀에게 월드컵 본선 티켓 1장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 이에 A지역 예선에는 서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이슬람계 국가인 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 국가인 호주, 뉴질랜드 및 정치적 고려로 북한이 참가하였고 B지역 예선에는 동아시아 국가들 및 정치적 고려로 이스라엘이 참가하였다. 이 때 A지역 예선은 1973년 3월부터 8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된 반면, B지역 예선은 서울시리즈라 하여 대한민국 서울에서 1973년 5월 16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되었다.


예선 진행 (서울시리즈)[편집]

B지역 예선에 참가하여 서울을 찾은 국가대표팀들은 대한민국, 일본, 이스라엘, 홍콩, 남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까지 총 7개팀이었다. 7개팀 중 개최국인 한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6개국은 조 결정 경기를 통해 1조 홍콩, 일본, 남베트남 / 2조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태국으로 배정이 완료되었고 한국은 고심 끝에 2조에 참가하여 이스라엘과 한판 붙어보기로 한다.


아시아예선 대표팀 선발 명단[편집]

아시아예선 참가를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972년 12월부터 국가대표 상비군을 만들어 11개월간 합숙을 하며 서독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당시 서독 월드컵 대표팀 엔트리, 즉, 국가대표 상비군 명단은 다음과 같다.[14]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스탭진
감독 민병대 KFA 작고
코치 문정식 KFA 작고
선수단
GK 이세연 신탁은행 전 대한축구협회 이사
변호영 서울은행 전 홍콩한인회 회장
FB 박영태 해병대
유기흥 해병대 한국실업축구연맹 상벌위원장
김호곤 연세대학교 울산 현대 감독
강기욱 육군 광운대학교 축구부 감독
문구호 육군
김희태 연세대학교 김희태축구교실 회장
HB 이차만 고려대학교 부경고등학교 감독
고재욱 고려대학교 한국여자축구연맹 고문
박병철 한양대학교 개인사업
FW 박이천 국민은행 인천 유나이티드 부단장
정규풍 국민은행 한국중등축구연맹 부회장
차범근 고려대학교 MBC 해설위원
김진국 육군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
김재한 주택은행 대한축구협회 비상임 이사
강태현 육군
유건수 한양대학교
유동춘 한양대학교 서울공고 축구부 감독
김삼남 고려대학교

※ 현 소속팀은 2012년 8월 1일 기준입니다.


1978년 FIFA 아르헨티나 월드컵[편집]

1982년 FIFA 스페인 월드컵[편집]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편집]

1990년 FIFA 이탈리아 월드컵[편집]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편집]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편집]

아시아 조별예선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기 때문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16강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본선 무대 1승도 못해봤는데 설레발ㅉㅉ 가득한 기사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1차전 상대인 멕시코전에선 하석주선수의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 1승 달성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는데... 하석주가 백태클을 시전하고 다이렉트로 퇴장당하면서 멕시코에게 분위기를 내주게 되어 결국 1:3 역전패를 당한다. 2차전 상대는 휘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 압도적인 오렌지 군단의 파괴력과 태극전사의 무기력한 경기력이 맞물려 0:5 대패를 당하고, 차범근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3차전은 김평석 대행체제로 벨기에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1:1 무승부로 경기가 종료된다.


월드컵 대표팀 선발 명단[편집]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김병지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2 MF 최성용 상무 선수생활 은퇴
3 DF 이임생 부천 SK 선수생활 은퇴
4 DF 최영일 부산 대우 로얄즈 선수생활 은퇴
5 DF 이민성 부산 대우 로얄즈 선수생활 은퇴
6 MF 유상철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7 MF 김도근 전남 드래곤즈 선수생활 은퇴
8 MF 노정윤 NAC 브레다 선수생활 은퇴
9 FW 김도훈 빗셀 고베 선수생활 은퇴
10 FW 최용수 상무 선수생활 은퇴
11 MF 서정원 RC 스트라스부르 선수생활 은퇴
12 DF 이상헌 안양 LG 치타스 선수생활 은퇴
13 DF 김태영 전남 드래곤즈 선수생활 은퇴
14 MF 고종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15 MF 이상윤 천안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16 DF 장형석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17 MF 하석주 세레소 오사카 선수생활 은퇴
18 FW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선수생활 은퇴
19 DF 장대일 천안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20 DF 홍명보 벨마레 히라츠카 선수생활 은퇴
21 FW 이동국 포항 스틸러스 선수생활 은퇴
22 GK 서동명 상무 선수생활 은퇴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발 명단[15][편집]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 생활 은퇴
2 MF 현영민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 생활 은퇴
3 MF 최성용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 생활 은퇴
4 DF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5 MF 김남일 전남 드래곤즈 선수 생활 은퇴
6 MF 유상철 가시와 레이솔 선수 생활 은퇴
7 MF 김태영 전남 드래곤즈
8 MF 최태욱 안양 LG 치타스
9 FW 설기현 RSC 안더레흐트 선수 생활 은퇴
10 FW 이영표 안양 LG 치타스 선수 생활 은퇴
11 MF 최용수 JEF 이치하라
12 DF 김병지 포항 스틸러스 선수 생활 은퇴
13 DF 이을용 부천 SK 선수 생활 은퇴
14 MF 이천수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 생활 은퇴
15 MF 이민성 부산 아이콘스 선수 생활 은퇴
16 DF 차두리 고려대학교 선수 생활 은퇴
17 MF 윤정환 세레소 오사카 선수 생활 은퇴
18 FW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19 DF 안정환 페루자
20 DF 홍명보 벨마레 히라츠카
21 FW 박지성 교토 퍼플상가
22 MF 송종국 부산 아이콘스
23 GK 최은성 대전 시티즌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편집]

2002년 월드컵 본선 무대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낸 이후,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기까지 움베르투 코엘류, 조 본프레레 감독을 거쳐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로 월드컵 본선무대에 참가하게 된다. 토고를 상대로 2대1 역전승, 프랑스와 1대1로 비기는 듯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스위스에 2대0으로 패해 1승 1무 1패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로 16강 진출에 실패한다.

2006년 6월 23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알렉산더 프라이의 득점상황에서 부심이 오프사이드 기를 들었으나 오라시오 엘리손도 주심이 오프사이드 휘슬을 불지 않고 경기를 진행하였던 것에 대한민국 국민이 FIFA에 항의하면 재경기 열린답니다 모두 전자서명에 동참해주세요 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6]


2006년 6월 13일
15:00
대한민국 2 - 1 토고 슈타디온 프랑크푸르트
관중수: 48,000
심판: 그레엄 폴 잉글랜드
54' 이천수
72' 안정환
31' 쿠바자
2006년 6월 18일
21:00
프랑스 1 - 1 대한민국 첸트랄슈타디온
관중수: 43,000
심판: 베니토 아르춘디아 틀:나라자료 멕시코
8' 티에리 앙리 81' 박지성
2006년 6월 23일
21:00
스위스 2 - 0 대한민국 슈타디온 하노버
관중수: 43,000
심판: 오라시오 엘리손도 아르헨티나
23' 센데로스
77' 알렉산더 프라이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2 DF 김영철 성남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3 DF 김동진 FC GS 무앙통 유나이티드
4 DF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선수생활 은퇴
5 MF 김남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6 DF 김진규 주빌로 이와타 선수생활 은퇴
7 MF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생활 은퇴
8 MF 김두현 성남 일화 천마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FW 안정환 MSV 뒤스부르크 선수생활 은퇴
10 FW 박주영 FC GS FC GS
11 FW 설기현 울버햄튼 원더러스 인천 유나이티드
12 DF 이영표 토튼햄 핫스퍼 선수생활 은퇴
13 MF 이을용 트라브존스포르 선수생활 은퇴
14 FW 이천수 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생활 은퇴
15 MF 백지훈 FC GS 울산 현대
16 FW 정경호 광주 상무 선수생활 은퇴
17 MF 이호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18 DF 김상식 성남 일화 천마 선수생활 은퇴
19 FW 조재진 시미즈 S-펄스 선수생활 은퇴
20 GK 김용대 성남 일화 천마 울산 현대
21 GK 김영광 전남 드래곤즈 서울 E랜드
22 DF 송종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23 DF 조원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오미야 아르디자
* 예비명단 : 김병지(GS), 유경렬(울산), 김정우(나고야), 장학영(성남), 차두리(프랑크푸르트)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편집]

2010년 6월 12일
13:30
대한민국 2 - 0 그리스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
관중수: 31,513
심판: 미카엘 헤스터 뉴질랜드
7' 이정수
52' 박지성
2010년 6월 17일
13:30
아르헨티나 4 - 1 대한민국 사커시티 스타디움
관중수: 82,174
심판: Frank DE BLEECKERE 벨기에
17' 박주영 (자책골)
33' 이과인
76' 이과인
80' 이과인
46' 이청용
2010년 6월 22일
20:30
나이지리아 2 - 2 대한민국 더반 스타디움
관중수: 61,874
심판: 올레가리오 벤케렌카 포르투갈
12' 우체
69' 야쿠부 (페널티킥)
38' 이정수
49' 박주영
2010년 6월 26일
16:00
우루과이 2 - 1 대한민국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
관중수: 30,597
심판: 볼프강 슈타르크 독일
8' 수아레스
80' 수아레스
68' 이청용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선수생활 은퇴
2 DF 오범석 울산 현대 강원 FC
3 DF 김형일 포항 스틸러스 시암 네이비 FC
4 DF 조용형 SK 유나이티드 선수생활 은퇴
5 MF 김남일 FC 톰 톰스크 선수생활 은퇴
6 MF 김보경 오이타 트리니타 울산 현대
7 MF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생활 은퇴
8 MF 김정우 상주 상무 선수생활 은퇴
9 FW 안정환 다롄 스더 선수생활 은퇴
10 FW 박주영 AS 모나코 FC GS
11 FW 이승렬 FC GS 선수생활 은퇴
12 DF 이영표 알 힐랄 FC 선수생활 은퇴
13 MF 김재성 포항 스틸러스 선수생활 은퇴
14 DF 이정수 가시마 앤틀러스 샬럿 인디펜던스
15 MF 김동진 울산 현대 호이킹 SA
16 FW 기성용 셀틱 FC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7 MF 이청용 볼턴 원더러스 FC VfL 보훔
18 GK 정성룡 성남 일화 천마 가와사키 프론탈레
19 MF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FW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전북 현대 모터스
21 GK 김영광 울산 현대 서울 E랜드
22 DF 차두리 SC 프라이부르크 선수생활 은퇴
23 DF 강민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 예비명단 : 곽태휘(교토), 조원희(수원), 황재원(포항), 구자철(SK), 김치우(GS), 신형민(포항), 이근호(이와타)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편집]

2014년 6월 17일
18:00
러시아 1 - 1 대한민국 아레나 판타나우
관중수: 37,603
심판: 네스터 피타나 아르헨티나
74' 케르자코프 68' 이근호
2014년 6월 22일
16:00
대한민국 2 - 4 알제리 에스타지우 베이라히우
관중수: 42,732
심판: 롤단 윌마르 콜롬비아
50' 손흥민
72' 구자철
26' 슬리마니
28' 할리시
38' 자부
62' 브라히미
2014년 6월 26일
17:00
대한민국 0 - 1 벨기에 아레나 코린티안스
관중수: 61,397
심판: 벤저민 윌리엄스 틀:나라자료 호주
78' 얀 페르통언
번호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현 소속팀
1 GK 정성룡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가와사키 프론탈레
2 DF 김창수 가시와 레이솔 울산 현대
3 DF 윤석영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GS
4 DF 곽태휘 알 힐랄 FC GS
5 MF 김영권 광저우 에버그란데 광저우 에버그란데
6 DF 황석호 산프레체 히로시마 시미즈 S펄스
7 MF 김보경 카디프 시티 가시와 레이솔
8 MF 하대성 베이징 궈안 FC GS
9 MF 손흥민 바이엘 04 레버쿠젠 토트넘 홋스퍼
10 FW 박주영 아스날[17] FC GS
11 FW 이근호 상주 상무 울산 현대
12 DF 이용 울산 현대 전북 현대
13 FW 구자철 마인츠 05 마인츠 05
14 MF 한국영 가시와 레이솔 강원 FC
15 MF 박종우 광저우 푸리 수원 삼성
16 MF 기성용 스완지 시티 뉴캐슬 유나이티드
17 MF 이청용 볼턴 원더러스 Vfl 보훔
18 FW 김신욱 울산 현대 전북 현대
19 MF 지동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아우쿠스부르크
20 DF 홍정호 FC 아우쿠스부르크 전북 현대
21 GK 김승규 울산 현대 비셀 고베
22 DF 박주호 마인츠 05 울산 현대
23 GK 이범영 부산 아이파크 강원 FC
* 예비명단 : 김진현(세레소), 김기희(전북), 장현수(광저우), 이명주(포항), 김민우(사간 도스), 남태희(레퀴야), 김진수(니가타)[18]

참고[편집]

  1. 왜냐하면 국외로 선수단이 나가 경기를 하려면 체류비 등 외화가 필요한데,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외화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만약 한국팀이 일본에게 질 경우, 그게 무슨 망신이냐. 숫제 경기를 안하는게 낫지 않겠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팀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있었던 셈.
  2. 여담으로 이 경기가 최초의 한일전이었다.
  3. 2009년 김현회 기자의 기사 [1] 이후로 생존 여부가 분명치않은데, 2015년 아시안컵을 앞두고 AFC는 아래 박경호 옹을 1회 아시안컵 대회 우승 멤버 중 유일한 생존자라 소개했다하니, 2009년 ~ 2015년 사이에 돌아가신듯 하다. 자세한건 링크 참고 [2]
  4. 당시는 서울 여의도에 공항이 있었다. 지금의 김포로 공항이 옮겨진건 1958년 이후의 일.
  5. 당시 6월 13일 표도 20장 만을 구해 22명인 대표팀이 타기엔 좌석수가 모자랐으나, 사정을 들은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해줘 간신히 스위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
  6. 박규정 씨의 회고에 의하면 최정민 선수가 1:1 찬스도 잡았었다고 한다. 이때 한국이 선취골을 넣었다면 좋았을걸..
  7. 당시 홍덕영 선수의 선방이 없었다면 15:0도 가능했다는게 중론이다. 훗날 회고에서 홍덕영 씨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을때마다 바위를 막는 기분이셨다고. 경기 끝난 후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8. 그러나 대부분 한국축구사에서 스위스 월드컵은 본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잊고싶은 대회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9. 이와 관련해 나무위키에 세세한 서술이 되어있긴 하나, 신뢰할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직원 분실 사실만 기재한다. FIFA 문건에서 한국의 불참 사유는 'Entries not accpeted'라고 서술되어 있다.
  10.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
  11. 좌측 5번 유고 선수의 신장에 완전히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 선수와 유고 선수의 신체 조건 차이가 컸다.
  12. 1956년 올림픽 은메달, 1958년 월드컵 8강, 1960년 유로 준우승을 석권한 멤버들이 1962년 칠레 월드컵에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당시 유고는 유럽 예선에서 못해서 P.O 무대에 진출했다기 보다는 조 배정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다른 유럽 예선조는 3 ~ 5팀 경기로 짜여졌으나, 유고가 낀 유럽 예선 10조는 아이슬란드의 기권으로 2팀만 참가했기 때문.
  13. 당시 한국팀이 경기를 지면 거리낌없이 야유를 퍼붓던 관중들도 '비록 승부는 이미 갈렸지만, 오늘처럼만 경기하면 후회없다. 유고가 강했지, 우리가 못한게 아니다'라며 호평을 보낼 정도였다.
  14. 최종 예선이었던 호주전 엔트리 기준이다.
  15. 현 소속팀은 2014년 10월 기준입니다.
  16.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 이호의 발에 맞고 굴절된 공이 알렉산더 프라이에게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규정상 온사이드였으며, 주심은 이 상황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오프사이드 선언을 하지 않았던 것. 당시 유일하게 온사이드를 주장한 해설가 신문선씨는 국민여론에 휘말려 좌초(?)되었다.... 안습
  17. 실제로는 이미 상호 해지로 아스날을 떠나 무직 상태였다.
  18. 본래 최종 엔트리에 있었으나 부상으로 낙마, 그 대신 박주호가 최종 명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