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체발전량의 대부분이 북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북에서 전력을 끌어와 사용했는데 47년 3월 소군정이 남한에 대한 전기 공급료 500만 달러 청구, 이에 6월 미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 전업부사장 김은석 등이 평양을 방문하여 소군정당국과 전력공급료 지불에 관한 협정 체결했다. 그러나 47년 2차에 걸친 대북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남북전력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48년 5월 14일 북으로부터 전력이 단전되었다. 단전당시 전체 발전량중 남에서의 발전량이 12.4%에 불과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어 계획배전과 윤전제가 실시되게 되었다. 이후 49년 대통령 특별유시로 발전사업 일원화 조치가 취해져 남선전기, 경성전기 등의 회사와 농림부, 상공부 등에서 진행하던 발전 사업이 조선전업으로 일원화 되었다. | 당시 전체발전량의 대부분이 북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북에서 전력을 끌어와 사용했는데 47년 3월 소군정이 남한에 대한 전기 공급료 500만 달러 청구, 이에 6월 미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 전업부사장 김은석 등이 평양을 방문하여 소군정당국과 전력공급료 지불에 관한 협정 체결했다. 그러나 47년 2차에 걸친 대북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남북전력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48년 5월 14일 북으로부터 전력이 단전되었다. 단전당시 전체 발전량중 남에서의 발전량이 12.4%에 불과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어 계획배전과 윤전제가 실시되게 되었다. 이후 49년 대통령 특별유시로 발전사업 일원화 조치가 취해져 남선전기, 경성전기 등의 회사와 농림부, 상공부 등에서 진행하던 발전 사업이 조선전업으로 일원화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