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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활약해 우승을 차지했다.
 
활약해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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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을 거쳐 1956년에 이르러 중동 축구는 중동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록 오관왕의 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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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50회가 주축으로 활약한 중동 축구는 학도체육대회 서울 예선에 첫 우승을 거둔 후 전국체전 축구 예선과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제37회 전국체전, 전국고교축구대회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려 우리 나라 축구계를 경악케 하는 쾌거를 올렸다.
48회 이우현 동문은 초대 서울 체육고등학교 축구부 코치와 MBC 해설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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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도 역시 중동 축구는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체전 서울예선 준우승, 서울시 4대 고교 축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올려 그 해 열린 말레이시아 라만 수상컵 쟁탈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를 대비해 결성한 첫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차경복전전 남 일화프로축구감독, 강창선, 이낙원, 박경구 등 중동 선수가 7명이나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을 지내면서 많은 축구교재를 발간했다. 또한 서울 체고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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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 하고 중동 축구는 이후 10년 가까이 침체기를 갖게 된다.
위원인 이용수, 신문선, 강신우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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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을 거쳐 1956년에 이르러 중동 축구는 중동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록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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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왕五冠王의 해를 맞는다. 당시 50회가 주축으로 활약한 중동 축구는 학도체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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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선에 첫 우승을 거둔 후 전국체전 축구 예선과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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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회 전국체전, 전국고교축구대회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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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 우리 나라 축구계를 경악케 하는 쾌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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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는 당시 주축선수로는 50회 이계근전 서울체고 감독, 김승환, 유현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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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독일 유소년축구 프로그램 도입ㆍ88올림픽 조직위원ㆍ현 효성그룹 고문, 최귀인전 모교 축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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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유판순(전 모교축구감독ㆍ전 명지대 감독, 이동훈전 공군사관학교 감독, 이수덕, 최종국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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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관왕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동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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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기수는 축구도 잘했지만 명물도 많았다. 특히 우리 중동 축구의 명물 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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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순본명 유종원 동문의 일화가 유명하다. 대표선수시절 일본과의 시합 중 벤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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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유판순은 우리 나라가 일본 대표팀에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본인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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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 감독의 허락도 안 받고 교체멤버로 출전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한다. 명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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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감독 시절에는 관중들이 시합보다도 감독의 욕하는 모습을 더 재미있게 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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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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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유현철 동문은 한전 축구단 감독으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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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을 한전 축구부로 영입해서 대표선수로 키웠는데 74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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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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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장충준은 축구선수로는 흔치 않게 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50회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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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 동문은 당시 중동 축구의 센터포워드로 전국 고교랭킹 1위였으나 아쉽게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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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졸업 당시 영등포 삼일당의 벽돌 기습으로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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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당하기도 한 그는 이후 명동의 신상사와 지금까지 한국 주먹계의 큰형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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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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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도 역시 중동 축구는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체전 서울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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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우승, 서울시 4대 고교 축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올려 그 해 열린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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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컵 쟁탈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를 대비해 결성한 첫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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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전전 성남 일화프로축구감독, 강창선, 이낙원, 박경구 등 중동 선수가 7명이나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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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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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 하고 중동 축구는 이후 10년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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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기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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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중동 축구는 서서히 재기에 성공해 그 해 거의 10년 만에 종합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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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멤버를 보면 61회 나성수, 62회 원홍재, 조한흥이상 전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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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63회 고재욱전 모교감독ㆍ전 국가대표 현 관동대학교 축구감독, 64회 황재만전 국가대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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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비롯해 서대기, 김상희전 청소년대표 오우석, 김종철현 모교 체육교사, 65회 한병호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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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덕ㆍ박동식이상 전 청소년대표, 66회 이종설전 청소년대표, 67회 장기문전 국가대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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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등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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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용은 다음 해까지 계속 이어져 1969년 제18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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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종합 전적 6승으로 전국의 강호 16팀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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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서 우승해 한ㆍ일 교환경기의 대표권을 얻은 중동 축구는 일본 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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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고 대표팀을 11대0으로 대파하는 등 화려한 전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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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60~70년대 중동축구를 빛낸 동문들은 53회 전상준전 청소년대표, 황정일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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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중동중고등학교 축구부감독, 54회 김상구전 국가대표, 오근영전 대전상고 감독, 심근택전 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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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55회 홍인웅전 국가대표, 안원남전 국가대표, 주민환전 국가대표, 56회 김호엽전 국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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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임충웅전 청소년대표, 서재학전 청소년대표, 57회 조명철현 OB축구회 회장, 이 관전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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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이충남전 청소년대표, 58회 조중연전 청소년대표ㆍ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59회 김원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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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대표, 송영준전 청소년대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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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회 황정일 동문은 20여 년간 중동중학교 감독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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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특히 이번 100년사에 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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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회 조중연 동문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지난 2002년 월드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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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주역 중에 주역으로 모교 축구감독 과 현대 프로축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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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역임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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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오근영 동문은 대전상고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한국축구계의 유명한 골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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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태호 선수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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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회 고재욱 동문은 대표선수 시절 한전과의 경기 중 무릎 부상으로 화려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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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수를 마감하고 영남상고 축구부 감독에 부임한 다음 모교 축구 감독으로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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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다음해 전국고교축구대회 4개중 3번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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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재욱 동문은 한국 축구계에 특별한 스타급 선수를 배출시키는데 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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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학교 감독과 비운의 스타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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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감독 동문을 배출했으며, 이후 럭키금성 프로축구단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며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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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1년과 1995년에는 한국국가대표팀 감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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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약하다 현재는 관동대학교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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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회 황재만 동문은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10여 년간 한국 대표팀 부동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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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로 롱킥 과 롱드로잉, 거친 태클로 유명했다. 이후 할레루야 축구단 선수 및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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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 감독을 지내며 프로축구 원년 우승의 영광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원인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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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투병중인 황재만 동문은 굴하지 않는 사자정신으로 현재 한국 장애인럭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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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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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회 장기문 동문은 별명이 검은 장갑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상대 팀 선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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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중동의 정신인 사자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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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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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들어 다시 한 번 중동 축구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974년에 들어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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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저력을 과시하던 중동 축구는 다시 한 번 전국의 모든 패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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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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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축구는 그해 춘계연맹전, 건대총장배 대회, 대통령금배, 추계연맹전, 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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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축구대회 등에서 모두 우승하는 쾌거를 올려 중동 축구의 역사를 잇는 성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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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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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중동 축구의 빛나는 성적을 이룬 원동력은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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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모교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운동장을 누비던 선수들과 지도자의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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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동 축구부가 사용했던 운동장은 운동장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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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설이 매우 열악해 일명‘미아리 운동장’이라는 별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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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정도였고, 작은 동산을 없애고 선수들이 직접 운동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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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으나 운동장이 고르지 못해 매일 선수들이 돌을 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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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면서 축구연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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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고생하는 축구부 선수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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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돈을 모아 돼지를 기르기 시작었다. 매일 저녁 미아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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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식당에서 돼지 밥을 구해 양육을 하던 어느 날 그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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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순 동문이 모든 돼지를 선수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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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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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축구 연습만 해도 모자랄 선수들이 운동장을 고르고 돼지를 키우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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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고 수많은 국가대표선수들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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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했던 것은 중동인의 정신, 바로 사자정신을 나타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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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75년 제68회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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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승리했다. 우승의 기쁨으로 재학생과 응원했던 전 동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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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 모교까지 거리행진을 해 학교에 도착하니 자정에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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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시간으로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전교생이 학교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 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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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에 임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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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의 중동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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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특출한 성적으로 국내 무대는 물론 해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동 축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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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한ㆍ일 고교교환 경기에 출전해 3전 전승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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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했고, 그 해 서울특별시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한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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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수도권 교환경기대회에 일본팀과 대전해 3전 3승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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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맹활약한 선수로는 68회 고청범, 이기석 이성용이상 전 청소년대표, 69회 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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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최재필, 김재원이상 전 청소년대표, 70회 김성호전 청소년대표, 71회 유재영, 임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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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근이상 전 청소년대표, 72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 74회 김광용현 모교 축구부 부장, 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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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 감독, 변종국독일 유학청소년대표ㆍ현 아약스코리아 유소년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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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차상광전 국가대표ㆍ성남 일화 코치,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감독, 77회 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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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박동규이상 전 청소년 대표, 78회 차상해전 국가대표, 손태호현 모교 코치, 79회 허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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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이상 전 국가대표, 김두선전 모교 코치, 김청훈현 청소년대표 코치, 80회 이승욱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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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학교 감독, 81회 이병성전 청소년, 82회 송 훈전 청소년 대표, 김용범전 국가대표, 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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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박충균이상 전 국가대표, 서동훈, 박정민전 남북 단일팀 대표 94회 이호전 월드컵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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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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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는 전국 중ㆍ고 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 학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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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권 대회의 한국 대표로 출전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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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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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팀은 전 세계의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해 한국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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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놀라운 힘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당시 76회 김종부 동문은 공격수로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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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약해 세계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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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래 32년만인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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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6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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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로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됨은 물론, 세계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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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우수성을 지구촌의 모든 축구팬에게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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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멕시코월드컵에서는 72회 김용세, 75회 조민국, 76회 김종부 동문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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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로 발탁돼 우수한 기량을 선보이며 중동 축구를 빛냈다. 또한 1998년 프랑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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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컵에서는 76회 정성진 동문이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로 참가했고, 2006년 독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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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컵에서는 94회 이 호 동문이 좋은 경기를 펼쳐 중동 축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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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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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이어 나갈 중동 축구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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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운명이 외세에 좌지우지되던 1900년대 초 탄생한 중동학교가 민족 교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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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으로 숭고한 의무를 지켜 온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이와 함께 중동인들도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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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는 매개체로 동문 간 뜨거운 애교심과 협동심을 통해 한국 축구계는 물론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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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발전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를 창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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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동 축구 역사를 돌아볼 때 수많은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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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동인의 뜨거운 축구 사랑과 선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 사자정신,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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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이야말로 중동 축구의 빛나는 역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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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동 축구도 새롭게 시작한 21세기에 발맞춰 100년을 넘어 1천년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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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큰 발자국을 이미 내디뎠다. 새로운 환경에 발맞춘 지도자들의 노력과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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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땀, 수천수만 동문들의 모교 사랑, 불굴의 사자정신 등이 중동 축구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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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 수천 년 후까지 중동 축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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