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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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고등학교(中東高等學校, Joong Dong High School. 이하 중동고)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축구위키인 풋케위키에서 중동고라 함은 중동고등학교 축구부를 의미한다.


중동고등학교[편집]

1906년 4월 2일 오규신, 유광렬, 김원배 선생이 한어, 산술 양과의 야학을 설립하면서 첫 출발하였으며, 1907년 1월 22일 중동야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09년 5월 10일 중동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16년 4월 5일 주학을 병설하며 3과 체제로 재편하였다. 1919년 1월 11일에는 사립중동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중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6.25 동란기 교사가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임시 야학교를 개설하는등 명맥을 이어갔으며, 1951년 8월 25일 중동고등학교 인가를 받은뒤 서울 종로 수송동에 신교사를 재건하기에 이른다. 이후 1982년 10월 23일 야간고등학교를 폐지, 중동중, 중동고 모두 1984년 3월 1일 강남구 신축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교훈은 ‘정직(正直), 근면(勤勉), 청결(淸潔)’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목련이다.


중동고등학교 축구부[편집]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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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중동학원은 1927년 백농 최규동 선생께서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살리고자 축구ㆍ농구ㆍ유도부를 창단함으로써 중동의 찬란한 축구 역사가 시작됐다. 중동 축구의 역사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한 근거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초기의 중동 축구 한국 축구의 시작은 1920년대 초 외국 선교사들이 각종 구기를 소개, 지도하며 그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중동 축구팀이 창설된 1928년 무렵 당시의 축구계는 평양의 숭실, 서울의 경신 등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중동 축구는 1928년 조선 신궁대회 예선에서 강호 경신과 대전했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우리 중동은 애석하게도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경기가 신예 중동 축구가 서서히 그 기반을 굳혀 나가는 첫 발걸음이 됐다. 이후 중동 축구는 모든 면에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착실한 훈련을 통해 많은 발전을 가져와 1934년 조선체육회 창설 15주년 종합경기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 성적을 올리며 그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1971년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그때의 멤버들은 다음과 같다. 골키퍼 윤형섭, 풀백 최창흠ㆍ박명선, 하프백ㆍ최인모ㆍ전지경ㆍ신일근, 포드 강주세ㆍ김진옥ㆍ천갑손ㆍ전흥주 등이다. 이러한 첫 실적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중동 축구의 모습을 탄생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고, 1937년에 들어서 6중학 축구연맹전과 경성제대 주최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동 축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중동 축구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38년 보성전문 주최 제11회 중등대회 준우승, 같은 해 전全조선축구대회 겸 전일본축구 예선 대회에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1939년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컵을 안고 경성 역에 도착한 선수들을 전교학생들이 무등을 태워 본교까지행진하고 본교 운동장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님께서 황소를 잡아 전교생이 파티 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진용을 보면 이시동, 박건섭, 이기주, 정형식, 곽정빈, 정인호, 이강열, 이범태, 유명석, 최병섭, 하진용 동문이 활약했다. 특히 38회 이시동 동문은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며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선수로 출전했었고,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홍콩 프로팀의 선수로 스카우트 되는 등 초창기 중동 축구의 상징이 됐다.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빠져 나온 중동 축구는 새로운 세상을 맞아 더욱 성숙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45년 열린 해방 경축 종합대회인 5개 지역 축구대회에서 중동 축구는 강호 배재,보성,중앙,휘문 등과 함께 기량을 겨뤄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39회 이범태, 최병섭 동문들의 실력은 대표선수 이상이었다. 1946년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서울시 기념대회 우승, 1947년 제2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올려 해방 후 새롭게 중동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후 거침없는 연승 가도를 달린 중동 축구는 1948년 학도체육대회 서울예선 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고 1949년에는 제1회 전국 학도체육대회 우승과 함께 다시 한 번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해 중동 축구의 놀라운 실력을 입증했다. 그 당시 주축선수로는 42회 오완건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명환전 모교 축구감독, 김형배, 김돈해, 김포경, 강석영, 김석봉 동문 등이 있었고 또한 그해 1948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선수로 38회 이시동 동문이 출전해 중동 축구를 세계로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특히 오완건 동문은 27년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대한축구협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원래 중동의 유니폼은 전통의 노란색으로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6.25전쟁이 나자 노란색 원단을 구하지 못해 흰색 상의와 청색 하의 유니폼을 착용한 적이 있었다. 타학교 학생들은 중동의 노란색 유니폼만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노란색 유니폼은 누구나 중동 축구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활약해 우승을 차지했다. 1955년을 거쳐 1956년에 이르러 중동 축구는 중동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록 오관왕의 해를 맞는다. 당시 50회가 주축으로 활약한 중동 축구는 학도체육대회 서울 예선에 첫 우승을 거둔 후 전국체전 축구 예선과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제37회 전국체전, 전국고교축구대회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려 우리 나라 축구계를 경악케 하는 쾌거를 올렸다. 1957년에도 역시 중동 축구는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체전 서울예선 준우승, 서울시 4대 고교 축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올려 그 해 열린 말레이시아 라만 수상컵 쟁탈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를 대비해 결성한 첫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차경복전전 남 일화프로축구감독, 강창선, 이낙원, 박경구 등 중동 선수가 7명이나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 하고 중동 축구는 이후 10년 가까이 침체기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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