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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월 28일 등록기간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완산 푸마는 93시즌 참가와 92년 7월의 창단 승인 모두가 소급하여 무효가 되어버렸고, 완산스포츠클럽과 완산 푸마 축구단은 부도처리되었다. [[정규풍]] 감독을 비롯해 완산 푸마 선수단 대부분은 밀린 계약금과 3개월치 임금 총 3억여원을 전북은행이 발행한 약속어음으로 지급받았으나, 3월 3일 어음 발행주체의 부도처리와 함께 휴지조각이 되버렸고, 이로 인해 법정 분쟁이 벌어지는 등, 완산 푸마 소동의 휴유증은 93년 내내 끊이질 않았다.
 
결국 2월 28일 등록기간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완산 푸마는 93시즌 참가와 92년 7월의 창단 승인 모두가 소급하여 무효가 되어버렸고, 완산스포츠클럽과 완산 푸마 축구단은 부도처리되었다. [[정규풍]] 감독을 비롯해 완산 푸마 선수단 대부분은 밀린 계약금과 3개월치 임금 총 3억여원을 전북은행이 발행한 약속어음으로 지급받았으나, 3월 3일 어음 발행주체의 부도처리와 함께 휴지조각이 되버렸고, 이로 인해 법정 분쟁이 벌어지는 등, 완산 푸마 소동의 휴유증은 93년 내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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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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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우 엑스터 ==
[[File:제우엑스터.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93년 12월 제우정보 프로구단 창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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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제우엑스터.JPG|280픽셀|섬네일|오른쪽|93년 12월 제우정보 프로구단 창단 광고]]
 
완산 푸마 축구단 자체는 와해되었으나, 선수들 중 타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십수명의 선수와 [[최상철]] 감독대행을 비롯한 코칭스탭은 훈련을 계속하며 93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참가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이를 두고볼수만은 없었던 [[대한축구협회]]측도 호남권 향토기업과 당시 K-리그와 컵대회 스폰등을 맡고있었던 기업들에게 완산 선수단 인수를 권유했으나, 일이 잘 풀릴리 만무했다.  
 
완산 푸마 축구단 자체는 와해되었으나, 선수들 중 타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십수명의 선수와 [[최상철]] 감독대행을 비롯한 코칭스탭은 훈련을 계속하며 93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참가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이를 두고볼수만은 없었던 [[대한축구협회]]측도 호남권 향토기업과 당시 K-리그와 컵대회 스폰등을 맡고있었던 기업들에게 완산 선수단 인수를 권유했으나, 일이 잘 풀릴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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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93년 8월 컴퓨터 조립업체였던 제우정보에서 선수단을 인수하고 가칭 '''제우 엑스터 프로 축구단''' 창단 발표와 94시즌 참가를 선언하였으나, 제우정보가 경영 위기를 맞으면서 스폰 포기 (95년 4월에 제우정보는 부도처리되었다.), 결국 전북일보와 보배소주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전북 버팔로]]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완산 푸마 사태는 겨우 일단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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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93년 8월 컴퓨터 조립업체였던 제우정보에서 선수단을 인수하고 가칭 '''제우 엑스터 프로 축구단''' 창단 발표와 94시즌 참가를 선언하였으나, 제우정보가 경영 위기를 맞으면서 스폰 포기 (95년 4월에 제우정보는 부도처리되었다.), 결국 전북일보와 보배소주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전북 버팔로]]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완산 푸마 사태'''는 겨우 일단락 되었다.
    
== 완산 푸마사태가 남긴 영향 ==
 
== 완산 푸마사태가 남긴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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