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 푸마
완산 푸마 | |
---|---|
250px | |
기본정보 | |
정식명칭 | 완산 푸마 프로축구단 |
원어명 | 로마 :Wansan Puma Pro Soccer Team |
클럽색 | green |
창단년도 | 1993년 |
홈경기장 | 전주종합운동장 |
연고지 | 전라북도 |
운영 | |
운영법인 | 완산스포츠클럽 (1993.1~1994.2) |
구단주 | 오형근 |
단장 | 정일진 |
감독 | 정규풍 |
소속리그 | K리그(?) |
홈페이지 | |
현재시즌 |
소개[편집]
완산 푸마란 1992년 3월 대한축구협회에 창단 신청한 후, 1992년 7월 창단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가 1993년 3월 부도처리된 축구팀이다. 정식 창단도 못하고 망했다고 해석함이 옳을듯. 명실공히 K리그의 흑역사 중 하나다.
역사[편집]
완산 푸마 창단 승인의 배경[편집]
완산 푸마 사건이 일어났던 배경에는 전라도 권의 프로축구팀 부재가 깔려있었다. 본래 1983년 수퍼리그 출범 당시, 국민은행 축구단이 전라도를 연고지로 배정받았었지만 당시 연고권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장식용에 지나지않았고 이 명목상의 연고권 소유 구단이었던 국민은행 마저 1984시즌을 마지막으로 실업 무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1985년부터는 할렐루야 축구단이 전라도를 연고지로 재설정 하였으나, 할렐루야 역시 1985년을 마지막으로 실업 구단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결국 1986년부터 전라도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 축구단이 부재하게 됨에 따라, 전라도 프로 축구단 창단 문제가 축구계에 중요한 화두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1987년 (주)미원과 (주)광주고속을 포함한 호남 8개 기업이 공동 출자로 호남 프로 축구단 창단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전개된바 있다. 하지만 목표 출자비율에 35%나 모자라 끝내 창단은 무산되었다.[1] 이어 1989년에는 신생팀 일화 천마 축구단의 연고지역을 대한축구협회는 전라권으로 설정하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된다.[2]
전라 진도개 축구단 창단 구상[편집]
이처럼 창단 무산만 거듭하다 1991년 9월, 전라북도 전주에서 가칭 완산스포츠클럽 (혹은 전라스포츠클럽)이 운영하는 전라 진도개 프로 축구단의 창단 구상 발족회가 열리면서 처음 완산 푸마 창단의 구상이 공개되었다. 당시 완산스포츠클럽 대표였던 오형근[3]씨는 해외자본과 향토기업 투자 유치 및 입장 수입 등을 토대로 자본금 3,40억을 마련후, 연간 20억 선에서 팀을 운영할 계획을 구상중임을 발표했던 것. 전라권 축구단 창단이 연이어 무산된 경험이 있던 대한축구협회는 호남권을 연고로 하는 제 7구단 창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이런 시점에 완산스포츠클럽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이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전폭적인 후원과 함께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진행되었는데.. 앞뒤 안보고 뛰어든 제 7구단 창단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불안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완산 푸마 창단 승인[편집]
이듬해인 1992년 3월, 완산스포츠클럽은 스포츠 용품 판매사인 푸마[4]와 2년 동안 총 25억의 스폰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하며 축구협회에 가입금 2천만원을 납부 후, 공식 명칭 완산 푸마 축구단으로 같은 해 6월까지 선수단을 구성하여 아디다스 컵대회에 참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언론들은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는데 왜냐하면, 오씨 주장과는 별개로 실제로 스폰대금이 입금되었다는 정황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고, 1992년 2월부로 대학을 졸업한 축구 선수들은 동년 3월 현재시점에서 이미 제각기 프로 내지 실업팀으로의 계약을 끝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도 없고 지명할 선수도 없는데 무슨 수로 6월까지 팀을 창단해 참가하겠냐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완산스포츠클럽은 K리그 타 구단와의 협의를 통해 각 팀 당 2명씩 92시즌 1년동안 임대해 팀을 운영하겠다는 등의 복안을 마련했으나, 실현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예정했던 92년 6월 컵대회 참가도 물건너가고, 혼선을 빛었으나 같은해 7월 대한축구협회는 K리그 6개 구단주 협의회를 소집하여 장고 끝에 완산 푸마의 창단을 승인하였다.당시 6개 구단주들은 운영주체도 불분명한 완산 푸마의 참가를 탐탁치않게 여겼으나,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팀 창단이 절실하다는 축협의 대승적(?) 주장에 수긍하고 말았다.(우측 기사 참조)
스탭진[편집]
선수단[편집]
파문의 연속과 해체[편집]창단 승인 이후 공식화된 완산 푸마 창단준비위원회는 7월, 정규풍 씨를 3년계약으로 완산 푸마 창단 감독으로 계약하고, 92년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1993년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프로축구연맹은 완산 푸마에 창단팀 우선 지명권을 부여해 당대 대학권 최고급 선수였던 황선홍, 강철, 정재권, 노정윤, 김태영 등이 완산 푸마에 지명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완산 푸마의 상황을 누구보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선수들은 드래프트 거부를 불사하며 완산 푸마 지명을 회피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노정윤 선수는 J리그 진출, 정재권, 김태영 등은 실업팀에 입단하는등 파행을 겪었다. 황선홍 선수의 경우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완산 푸마에 1순위로 지명되었으나 황선홍과 가계약을 이미 맺어놨던 포항제철 아톰즈측이 완산 푸마측과 사상 유례없는 1:8 트레이드를 감행함에 따라 황선수는 포항제철에 입단하게되었다. (자세한건 1993년 드래프트 참조) 우여곡절 끝에 드래프트와 입단테스트를 통해 총 26명의 감독, 코칭스탭, 선수단이 완성되며 1993년 1월16일 전주관광호텔에서 성대하게 창단식을 연 것까지 좋았으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창단식을 연지 1주일도 안된 1월22일까지 선수단에 계약금을 지급해야했지만 정규풍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탭과 완산 푸마 선수단 전원이 계약금은 커녕 작년 11월 선수단 구성이후, 총 3개월동안의 임금체불이 있었음이 드러났고, 완산 푸마 구단은 2월 10일까지 계약금 지급을 완료하고 27일부터 훈련을 실시하는것으로 합의했으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으면서 완산 푸마는 본격적으로 좌초 상황을 겪게 된다. 상황을 감지한 대한축구협회측은 다가오는 1993년 2월 28일까지 선수 등록 기한을 연장하였고 정규풍 감독을 비롯해 완산 푸마 선수단 대부분은 밀린 계약금과 3개월치 임금 총 3억여원을 27일 지급받으며 리그에 정상적으로 참여 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당초 알려진것과 달리 현금이 아닌 전북은행이 발행한 약속어음인 것으로 밝혀졌고, 3월 2일 어음의 부도처리와 함께 휴지조각이 되버리며 완산 푸마의 93년 리그 데뷔는 무산됐다. 전북 엑스터 축구단[편집]완산 푸마 축구단 자체는 와해되었으나, 선수들 중 타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십수명의 선수와 최상철 감독 대행을 비롯한 코칭스탭은 훈련을 계속하며 93년 제41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참가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이를 두고볼 수만은 없었던 대한축구협회 측도 호남권 향토기업과 당시 K리그와 컵대회 스폰등을 맡고있었던 기업들에게 완산 선수단 인수를 권유했으나, 일이 잘 풀릴리 만무했고 시간만 흘러갔다. 겨우겨우 1993년 11월, 컴퓨터 조립업체였던 제우정보에서 메인스폰서로 참여하고 가칭 제우 엑스터 프로 축구단[5] 창단을 발표하였고 94시즌 참가를 선언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는듯 싶었다. 하지만 제우정보 측이 스폰 금액을 부풀렸다는 내부 폭로[6],가 일어나면서 전북구단 측은 결국 제우정보와의 계약을 해지하였고[7], 푸마와의 계약문제에 이어 엑스터와의 이중계약 파문을 일으킨 오형근 전 구단주는 결국 구단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결국 3월18일 보배소주의 대표이사 문수기 구단주가 팀 운영의 강한의지를 보여주었고 구단주가 재정을 책임진다는 조건부로 전북 프로축구단 창단이 승인되면서 완산 푸마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이후 전북 프로축구단은 팀명을 전북 버팔로로 확정하며 1994년 시즌에 참가하게 된다. 완산 푸마 사태가 남긴 영향[편집]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5] (김현회|버팔로와 다이노스, 그리고 지금의 모터스 이야기)
참고[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