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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직'''(朝鮮紡織)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부산광역시|부산]]에 세웠던 방직회사로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적산기업<ref>적산기업(敵産企業)은 말그대로 적의 생산기업,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었다가 해방되면서 이들이 내버려두고 떠난 뒤 국가소유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적산기업은 별다른 기반산업이 없던 해방 직후 한국 경제 내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적산기업은 이후 민간사업가에게 불하되어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ref>이었다. 조선방직이 운영하던 '''조선방직 축구단'''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아<ref>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있어 전쟁 참화를 빗겨갔다.</ref>한국전쟁 중에 창단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50년대 초반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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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직'''(朝鮮紡織)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부산광역시|부산]]에 세웠던 방직회사로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적산기업<ref>적산기업(敵産企業)은 말그대로 적의 생산기업, 즉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었다가 해방되면서 이들이 내버려두고 떠난 뒤 국가소유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당시 적산기업은 별다른 기반산업이 없던 해방 직후 한국 경제 내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적산기업은 이후 민간사업가에게 불하되어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ref>이었다. 조선방직이 운영하던 '''조선방직 축구단'''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아<ref>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있어 전쟁 참화를 빗겨갔다.</ref> 전쟁 중에 창단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50년대 초반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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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 ===
 
===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 ===
[[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 대한방직 대구공장(구, 조선방직 대구공장) 및 [[대구시민운동장]]. 운동장 위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대한방직 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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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2공단.jpg|썸네일|380픽셀]]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 화재로 전소되었다.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 [[대구운동장|대구시민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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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직 대구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이 소유하고 있던 대구 메리야스공장과는 별도의 공장으로 1940년 5월 일본 교토부를 거점으로 일본 제사업계를 양분하는 군시제사(郡是製絲.군제세이시)의 자본에 의해 세워진 '''군시방적'''(郡是紡績,군제보세키) '''대구공장'''이 모태이다. 방적기를 3만5천여추 보유하고 있었으나 해방 직후인 9월 일본인이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미군정에 적산으로 접수되어 불타버린 설비를 정비하여 1947년 현재의 위치에서 조업을 재개하였으며, 기존 부지에는 [[대구시민운동장|대구운동장]]이 건립되었다. 1949년 2월 '''대구방적공사'''(大邱紡績公社)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방직관계사업체 통합분리운영방침에 따라 11월 조선방직에 통합되어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변경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 공장은 생산관리가 융합되지 않아 제품원가까지 다를 만큼 독자적으로 운영되다시피 했을 정도로 경영상 비효율적이었다. 이처럼 독자 운영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방직 대구공장이라는 정식명칭 외에 '''대구방적''', '''대구방직''', '''대구조방''', '''조방대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ref>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ref>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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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방만한 운영구조는 양 공장 모두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사장이 직접 경영하는 부산공장에 비해 상무이사가 경영하는 대구공장의 운영은 더욱 심각했다. 대구공장은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빗겨가긴 했으나, 재생 설비와 전쟁시 소개되었던 설비 등을 모아 운영한탓에 설비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 <ref>그러나 결국 불하 후 조선방직 부산공장은 망했고 대구공장은 대한방직 대구공장으로 살아남았으니 아이러니. 참고로 당시 대구공장의 경영을 책임지던 상무이사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였다.</ref>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이 따로 분리되었으며, 5월 대한방직에 임대되었다가 8월 7억환에 대한방직 사장이자 자유당의 재정부장이었던 설경동에게 불하되어 '''대한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 대한방직 대구공장은 1997년 폐쇄되었으며, 2002년 공장터를 개발하여 현재 침산 푸르지오 1차 아파트와 메가박스 대구점과 [[이마트]] 칠성점이 입주해 있는 쇼핑몰 스펙트럼시티를 건설했다. 스펙트럼 시티에 있는 대한방직 대구사무소에서 아직도 분양중.
    
== 조선방직 축구단 ==
 
== 조선방직 축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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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_시민운동장.jpg|썸네일|380픽셀|1970년대 대한방직 대구공장(구, 군시방적/조선방직 대구공장) 및 구 군시방적터에 세워진 [[대구시민운동장]]. 운동장 위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대한방직 공장이다.]]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ref>[[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 출신 [[김규환]]이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 명칭일뿐 조방에 축구단이 존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ref>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사장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ref>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대한축구협회]]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강일매는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한 심복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축구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ref>  
 
'''조선방직 축구단'''은 1951년 창단된 실업 축구단이다. 조선방직, 혹은 조방으로 줄여서 불리웠다.<ref>[[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였던 [[보성전문]] 출신 [[김규환]]이 1950년 홍콩원정단 대표로 뽑힐 때 조선방직 소속이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그때는 아마추어 선수의 직장 명칭일뿐 조방에 축구단이 존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ref>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한 이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축구인들을 규합하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당시 축구인들의 염원이었는데, 사장 강일매의 결단으로 1951년 창단되었다.<ref>이 때의 공로로 강일매는 [[대한축구협회]] 12대 집행부의 부회장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강일매는 이승만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한 심복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축구원로들 사이에서는 계속 축구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로 기억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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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전쟁 직전까지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출신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 팀명으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과 '(본사의)조선방직' 2팀 모두 출전하여, 나란히 4강에 진출했었다. 본사 조선방직은 4강에서 공군에게 0: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은 공군을 1: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ref> 해당 경기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조방과 1~2명 외에는 선수 구성이 상동하므로 대구조방 축구팀이 본사팀을 제치고 조선방직 대표팀이 되었다 할 수 있다.<ref>여기에 대구방직 바로 옆 블록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위치해 있어 선수단을 관리하기도 편했을 것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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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전쟁 직전까지 대전방직에서 근무하던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출신 [[박대종]] 씨를 중심으로, [[옥정빈]], [[차순옥]], [[이철]], [[최정민]], [[박일갑]] 등 전쟁 중 이북에서 남하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팀을 구성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 팀명으로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조선방직은 '조선방직 대구공장'과 '(본사의)조선방직' 2팀 모두 출전하여, 나란히 4강에 진출했었다. 본사 조선방직은 4강에서 공군에게 0:2로 패했으며, 결승전에서 대구조방은 공군을 1:0으로 이기면서 우승을 차지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10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087&publishType=00020 30년전의 경향신문 1951년 10월 11~17일] -1981년 10월 10일, [[경향신문]]-</ref> 해당 경기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조방과 1~2명 외에는 선수 구성이 상동하므로 조선방직 축구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에 군시방적 공장 원래터에 [[대구시민운동장]]이 지어졌으므로 공장과 연습장이 가까워 선수단을 관리하기 편했고 대구공장의 책임자도 [[손기정]]이었으므로 여러므로 부산보다 축구단 운영이 편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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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 팀이란 명칭으로 참가하며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대한방직 사장인 설경동 씨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축구단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ref>설경동 씨가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 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 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형편은 아니었던 셈.</ref>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지만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은 1955년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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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후에는 조선방직팀이란 명칭으로 참가하며 1950년대 초중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다투었으나, 1955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대한방직 사장인 설경동 씨에게 불하되고 대구 대한방직 파업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축구단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ref>설경동 씨가 공장을 인수 한 이후 대구공장에 근무하던 2600명을 월급 1달치를 지급하면서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재고용하였으며, 남은 900명의 직원들은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으므로 처우 개선과 복직을 요구하는 대구 대한방직 쟁의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파업과 소송은 1960년 4.19 이후에나 해결되었으므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형편은 아니었던 셈.</ref> 1956년 도시대항 축구대회에서는 조선방직팀이 [[안성]]대표로 출전을 하거나, [[연세대]]와의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공식적인 출장은 1955년 [[전국선수권대회]]의 출장이 마지막이었다.
    
== 주요 선수 ==
 
== 주요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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