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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일화체프.jpg|180픽셀|섬네일|일화 시절 사리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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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시즌이 끝난 뒤 사리체프는 당시 아르센 뱅거감독이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AS모나코와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지만, 이적시기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일화 천마가 사리체프에게 테스트 제의를 했고, 사리체프는 목동구장에서 다른 선수 둘과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자체 청백전에서 사리체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일화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ref>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체결하지 않고 구장에서 체결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가 없었다 </ref> 통역도 없었고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나라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일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수비부분에서 막장을 달리는 수비 최악의 팀이었다. 91년 일화의 팀 실점은 무려 63실점, 리그에서 꼴찌였다. 박종환 감독은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사리체프를 기용했고,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다. 92년 사리체프는 40경기에 출장해 32실점을 마크하며 첫 시즌만에 0점대 방어율을 정복해버리더니, 93년 35경기 33실점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94년 36경기 33실점으로 3년째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더니, 95년에는 35경기에 실점은 단 27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에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다.<ref> 이러한 업적은 사리체프 혼자만이 아니라 [[안익수]], [[박광현]], [[겐나디]] 등을 필두로 한 수비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ref> 결국 이 여파로 국내 다른 구단들이 앞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고, <ref> 대표적인 예로 부천의 [[샤샤1|샤샤]], 전북의 [[알렉세이]], 수원의 [[헨릭]], 포항의 [[실바]]등이 있었다. </ref>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는 좁아졌다.<ref> 국내 골키퍼 가운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현대의 [[김병지]]와 LG의 [[김봉수]]가 전부였다. 이렇다보니 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골키퍼가 국가대표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고, 이것은 94 월드컵 [[최인영]]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 [[차상광]]의 알까기로 이어졌다. </ref> 결국 고심 끝에 연맹은 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사리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쿼터 첫해인 1996년 27경기 51실점으로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97년에는 16경기 27실점, 외국인 골키퍼가 사리체프 단 한명이었던 98년에는 단 5경기에 나와 16실점을 기록하며 추락. 98시즌이 끝난 뒤 천안에서 방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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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시즌이 끝난 뒤 사리체프는 당시 아르센 뱅거감독이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AS모나코와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지만, 이적시기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일화 천마가 사리체프에게 테스트 제의를 했고, 사리체프는 목동구장에서 다른 선수 둘과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자체 청백전에서 사리체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일화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ref>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체결하지 않고 구장에서 체결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가 없었다 </ref> 통역도 없었고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나라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일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수비부분에서 막장을 달리는 수비 최악의 팀이었다. 91년 일화의 팀 실점은 무려 63실점, 리그에서 꼴찌였다. 박종환 감독은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사리체프를 기용했고,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다. 92년 사리체프는 40경기에 출장해 32실점을 마크하며 첫 시즌만에 0점대 방어율을 정복해버리더니, 93년 35경기 33실점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94년 36경기 33실점으로 3년째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더니, 95년에는 35경기에 실점은 단 27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에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다.<ref> 이러한 업적은 사리체프 혼자만이 아니라 [[안익수]], [[박광현]], [[겐나디]] 등을 필두로 한 수비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ref> 결국 이 여파로 국내 다른 구단들이 앞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고, <ref> 대표적인 예로 부천의 [[샤샤1|샤샤]], 전북의 [[알렉세이]], 수원의 [[헨릭]], 포항의 [[드라간]]등이 있었다. </ref>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는 좁아졌다.<ref> 국내 골키퍼 가운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현대의 [[김병지]]와 LG의 [[김봉수]]가 전부였다. 이렇다보니 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골키퍼가 국가대표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고, 이것은 94 월드컵 [[최인영]]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 [[차상광]]의 알까기로 이어졌다. </ref> 결국 고심 끝에 연맹은 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사리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쿼터 첫해인 1996년 27경기 51실점으로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97년에는 16경기 27실점, 외국인 골키퍼가 사리체프 단 한명이었던 98년에는 단 5경기에 나와 16실점을 기록하며 추락. 98시즌이 끝난 뒤 천안에서 방출되었다.
    
== 안양 LG 시절 ==  
 
== 안양 LG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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