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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FIFA 칠레 월드컵]] = == 아시아 예선 ==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은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러낸다. 예선 상대는 숙적 일본. 이 예선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1차전 홈경기를 앞둔 [[효창운동장]]에 상대국 일본의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기 이전이었고 광복한지 15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기에 일장기를 함부로 걸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며 축구협회 측은 잔뜩 긴장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문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월드컵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이니 만큼 국가적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상대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일장기 게양을 촉구했고 체육계도 일장기 게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다만 문교부는 해당 경기를 승인했으나 일장기 게양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장문기]] 회장이 직접 장면 총리에게 허락을 받아낸 끝에 효창운동장에 일장기가 걸렸고 경기는 예정대로 1960년 11월 6일 오후 2시에 시작됐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수용 인원을 훨씬 초과한 4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15분 만에 [[문정식]] 선수가 왼쪽 쇄골을 부상당해 10명이 싸워야 했고, <ref>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ref> 전반 21분 사사키(Koji Sasaki)에게 선취골을 내줬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전반 39분과 41분에 [[특무대]] 소속이던 [[정순천]]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역전에 성공하였고, 더 이상 양팀의 득점이 나오지않아 2:1 대한민국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1961년 6월 11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진행된 예선 2차전에서도 한국팀은 시종일관 우세한 전력을 과시하며 전반 [[정순천]] 선수의 선취골과 후반 [[유판순]] 선수의 추가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두며 종합 전적 4:1의 스코어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 아시아/유럽 P.O == [[File:1962칠레PO.jpg|섬네일|300px|아시아/유럽 P.O 2차전에서 만회골을 성공시키는 유판순 선수.<ref>좌측 5번 유고 선수의 신장에 완전히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 선수와 유고 선수의 신체 조건 차이가 컸다.</ref><br/>[[김규환]] 당시 대표팀 코치가 소장한 사진을 월간축구 1973년 4월호에 게재한 것이다.]]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북중미 예선 통과 팀들이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남미 or 유럽팀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러야만 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가 배정되었다. 그리하여 1961년 10월 8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로 떠났으며,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공산 국가에서 A매치를 치르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성과는 별개로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길은 위에서 언급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못지 않게 험난했고 대표팀의 준비도 열악했다. 40시간에 이르는 비행 끝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유고와 경기를 치러야했기 때문. 설상가상 당시 유고 대표팀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강호였다.<ref>[[1956년 올림픽]] 은메달, [[1958년 월드컵]] 8강, [[1960년 유로]] 준우승을 석권한 멤버들이 1962년 칠레 월드컵에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당시 유고는 유럽 예선에서 못해서 P.O 무대에 진출했다기 보다는 조 배정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다른 유럽 예선조는 3 ~ 5팀 경기로 짜여졌으나, 유고가 낀 유럽 예선 10조는 [[아이슬란드]]의 기권으로 2팀만 참가했기 때문.</ref>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대표팀은 전반 40분까지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Zvezdan Čebinac에게 42분경 선취골을 내준 뒤 0:1로 전반을 마쳤다. 그러나 전반전 [[최정민]] 선수가 발목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 한국팀은 10:11의 싸움을 벌여야 했고 후반에 접어들면서 피로도가 급속도로 올라온 한국팀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경기 결과는 1:5 대패. 그나마 [[정순천]] 선수가 만회골을 터뜨린게 위안이었다. 이후 플레이오프 2차전은 동년 11월 26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는데 한국 선수들은 이미 승부가 갈렸다고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경기를 뛰었다. 결국 전반 초반 Milan Galić 선수에게 연거푸 2실점을 허용하며 또 무너지나 했는데.. 한국 선수들도 이대로 질 수는 없다며 심기를 다잡고 달려들었고, 후반 61분 [[유판순]] 선수가 만회골을 터뜨리며 1:2까지 쫒아가는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줬다.<ref>당시 한국팀이 경기를 지면 거리낌없이 야유를 퍼붓던 관중들도 '비록 승부는 이미 갈렸지만, 오늘처럼만 경기하면 후회없다. 유고가 강했지, 우리가 못한게 아니다'라며 호평을 보낼 정도였다.</ref> 하지만 경기 종료 직전, Dražan Jerković 선수가 코너 플래그 근처에서 그림같은 중거리 골을 때려넣으며 경기는 1:3 패배로 종료되었다. 결국 종합 스코어 2:8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좌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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