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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생활 == === 유소년 생활 ===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부평중학교와 [[부평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부평중 시절, 빠른 드리블 돌파와 예리한 킥으로 유소년 축구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는 부평고 진학 후에도 이어져 주축으로 활약하며 부평고의 각종 대회 우승에 핵심 멤버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교 시절인 1987년부터 연령별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고려대 진학 후에도 [[서정원]] 선수와 함께 준수한 활약을 통해 성인 대표팀과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호출되는 상승세를 이어가는 과정에 1990년 [[박종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최순호]]ㆍ[[황보관]]ㆍ[[김주성]]ㆍ[[변병주]] 등 베테랑 선수들이 포진한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정광석]]ㆍ[[서정원]] 등의 당시 유망주로 불리던 선수들과 함께 대표팀 막내로 발탁되어 동메달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조별리그에서 [[파키스탄]]을 상대로 [[A매치]] 첫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1992년 [[김삼락]] 감독이 이끄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차출되었으며 [[모로코]]ㆍ[[파라과이]]ㆍ[[스웨덴]]과의 조별리그 경기에 출전하였다.<ref>28년 만의 올림픽 출전으로, 본래 독일 출신 [[데트마르 크라머]] 총감독이 지휘하였으나, 크라머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와 불화로 본선 진출을 이루고도 사임하였고, 당시 코치 신분이었던 [[김삼락]] 씨가 본선 무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ref> === 드래프트 거부와 J리그 첫 한국인 선수의 탄생 ===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동안 각종 대회에서 대표 선수로 활약하면서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노정윤 선수는 [[K리그]]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는 대신 1993년 새롭게 출범하는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였다.<ref>입단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만 해도 [[에이전트]] 없이 단신으로 외국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 끝에 합격 받아야 해외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라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고 한다.</ref> 이러한 행적으로 노 선수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드래프트를 거부했다는 문제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극심했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8344 월드컵축구대표 2명 드래프트 신청 거부]</ref> 그러나 이러한 행보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법으로, 그것은 [[완산 푸마]]의 문제였다. 당시 [[완산 푸마]]는 1992년 11월에 열리는 드래프트에서 신생팀 자격으로 1순위 지명권을 쥐고 있었고, [[K리그 드래프트 1991]]에서 [[홍명보]] 선수와 함께 최대어로 불렸으나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황선홍]] 선수가 독일 진출 후 부상 문제로 국내로 돌아와 [[K리그 드래프트 1993]]에 참가할 것을 밝히고 [[완산 푸마]]에 지명되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었는데 여기에 노정윤ㆍ[[김태영2|김태영]]ㆍ[[강철]]ㆍ[[정재권]] 등의 대학 무대 드래프트 최대어 선수들 또한 싹쓸이 지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게 되면서 대학 무대 선수들이 동요하게 되었다.<ref>[[완산 푸마]]는 [[93 한국프로축구대회]] 참가를 목표로 한 축구단이었는데,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졸속 행정과 창단에 있어서 미흡한 준비 과정, 그리고 재정 문제가 한 곳에 잘 어우러져 불안한 예상이 나왔고, 그 전망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져 1992년 3월 창단 신청 후 딱 일 년 뒤인 1993년 3월 부도처리 되고 말았다. 대학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도 이러한 문제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집단으로 [[완산 푸마]]의 지명을 피하고자 [[실업축구]]와 해외진출을 모색하였고, 노정윤 선수는 해외진출에 성공한 케이스다. 자세한 내용은 [[완산 푸마]]ㆍ[[K리그 드래프트 1993]] 항목 참고.</ref> 게다가 당시 대학 리그 랭킹 1위를 달리던 [[정재권]] 선수가 [[완산 푸마]] 입단을 거부하고 [[실업축구]] 진출 의사를 밝히게 되면서 차순위인 노정윤 선수의 지명은 확실시되고 말았다. ===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네덜란드 진출 === 그렇게 노정윤 선수는 불안정한 [[완산 푸마]]에 지명되는 대신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게 되었다. 산프레체에 입단한 노 선수는 유명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특유의 스피드와 근성으로 첫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 1994년에는 완벽히 프로 무대에 적응하고 10득점을 넣는 대활약으로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깜짝 준우승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 진출 당시 부정적이었던 국내 여론을 뒤집고 [[김호]] 감독이 이끄는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어야 할 선수로 [[김주성]]과 함께 거론되며 국내에까지 활약상을 전파하였다. 월드컵을 마치고 소속팀으로 돌아온 노 선수는 1995년까지 두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수많은 도움을 기록하면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공격을 풀어주는 선수로 명성을 쌓게 되었으나, 1996년 시즌 중 스포츠 헤르니아 부상으로 전력에 이탈하게 되면서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여 대표팀에서도 멀어지고 말았으며, 1997년에는 12경기 출전에 그치는 아쉬운 활약을 보이고 말았다. 이후 1998년 1월에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퇴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중하위권 팀 NAC 브레다에 계약 기간 1년 6개월과 연봉 약 6억 8천만 원 수준의 호조건으로 유럽 무대 진출에 성공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305110 <축구> 노정윤, 네덜란드 이적, 유럽진출 붐]</ref><ref>1980년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한 [[허정무]]에 이어 두 번째 [[에레디비시]] 진출이며, 당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임대 이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네덜란드 리그에 입성한 노 선수는<ref>당시 포항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보였던 [[라데]]와 같이 뛰었다고 한다.</ref> 이적 초반부터 팀 데뷔 득점을 을 넣으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여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복귀하는 겹경사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소속팀에서는 점차 활약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었고,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도중 당한 무릎 부상으로 컨디션이 떨어져 1998-99 시즌부터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뒤처지게 되면서 일 년 동안의 네덜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팀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 세레소 오사카와 아비스파 후쿠오카 시절 === 네덜란드를 떠난 노정윤 선수는 세레소 오사카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고 [[J리그]]에 복귀하게 되었고, 당시 세레소 오사카에서 2년 차를 맞이한 [[황선홍]]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으며, 득점력은 산프레체 히로시마 시절보다 떨어지지만 노련해진 플레이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윤정환]]ㆍ[[김도근]] 선수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당시 세레소 오사카는 부진에 빠지는 바람에 [[김도근]]과 노정윤 선수를 내보내는 쪽으로 방침을 세우게 되면서 팀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후 [[K리그]] 복귀를 타진하게 되면서 [[울산 현대 호랑이]] 입단이 확실시되었지만,<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86856 노정윤 '컴백홈'... 울산서 뛴다]</ref> 9년 전 [[완산 푸마]] 입단을 피해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터라 규정에 묶여 무산되고 말았다.<ref>대체 방안으로 [[미포조선 축구단]]에 입단하는 것을 제시할 정도로 울산이 강력히 원했었지만, 노정윤 선수 측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라 생각해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5&aid=0000066534 노정윤 “내년에 다시 오겠다”]</ref> 그러한 이유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아비스파 후쿠오카에 입단하게 되어서 잔여 시즌도 일본에서 보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약체였던 후쿠오카는 2001년 시즌 종료와 함께 [[J리그 디비전2]]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후 2002년 2부 리그였던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주전 선수로 한 시즌 동안 활동하였으나, 시즌 초반 후쿠오카의 서포터즈가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고 노정윤 선수에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던지는 등의 볼썽사나운 행동을 보이자 팀 퇴단을 고민하였고, 구단 수뇌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에 있었던 일이 계기가 되어 시즌 종료와 함께 아비스파 후쿠오카를 떠나게 되었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2041329858 노정윤, '한국 유니폼 괄시'에 분노]</ref> === K리그 입성과 은퇴까지 === 2001년 규정에 묶여 무산되었던 [[K리그]] 진출이 2003년부터 해당 규정이 폐지됨에 따라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인 [[이안 포터필드]]가 신임 사령탑에 부임한 [[부산 아이콘스]]에 입단하게 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0303793 한국 첫 J리거 노정윤, 부산 입단]</ref> 중고 신인을 넘어 베테랑 신인(?) 자격으로 첫 국내 무대에 입성한 노 선수는 4월 [[안양 LG]]와 경기에서 킥오프 23초 만에 데뷔 골을 쏘아 올려 [[K리그 역대 최단시간 골]]에 이름을 올리는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빠른 발과 정교한 킥력, 노련미 등을 더해 선수비·후역습을 철저히 고수하던 [[이안 포터필드]] 감독 전술에서 역습의 중심으로 나서게 되었고, 이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서 활동량이 적고 압박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쿠키2|쿠키]]의 견제를 분산시키고 득점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팀 득점을 올리는 역할을 선보였고, 또한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올리기도 하였다. 활약은 2004년까지 이어져 지난 시즌보다 더 좋아진 모습으로 리그에서 30경기 4득점 6도움을 올려 제2의 전성기라 평가받고 부산의 첫 [[FA컵]] 우승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후 시즌 종료와 함께 지난 2001년 여름에도 노 선수의 영입을 추진하였던 [[김정남]] 감독의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였다. 울산에 입단한 이후로는 선발 스타팅 멤버에서는 내려왔지만, 후반 교체로만 35경기에 출전하며 젊은 선수였던 [[이천수]]ㆍ[[김진용2|김진용]]과 [[최성국]] 등의 선수가 지치면 투입되어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5개의 도움을 올리며 울산의 리그 우승의 조연이 되었다. 이후 2006년까지 울산에 머물렀으나, 축구 선수로 황혼기를 넘어선 나이로 체력 문제가 급격히 오는 이유로 2006년 4월 16일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SK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끝으로 출전 명단에서 빠지며 지도자 과정을 준비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를 선언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7&aid=0000055147 노정윤, '은퇴 임박'…지도자 연수 예정]</ref> === 국가대표 생활 === 1987년 청소년 대표를 시작으로 2000년 [[AFC 아시안컵]]까지 대표팀으로 활약하였다. 성인 대표팀 데뷔는 1990년 [[다이너스티컵]]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만 19세의 나이로 출전해 [[대한민국 A매치 최연소 출장]] 기록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대표팀 붙박이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여러 감독을 거치는 와중에도 꾸준히 이름을 올려 당시 최고의 게임메이커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약 3년 반이 넘도록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그 시기에는 또 다른 천재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 선수가 대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1998년 4월 15일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슬로바키아]]와 친선 경기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으며,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라는 이점으로 차 감독 전술의 중심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표팀에서 말년에도 꾸준히 각종 대회에 호출되며 많은 출전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고, 2000년 [[AFC 아시안컵]] 본선 조별리그부터 3·4위전인 [[중국]]과의 경기까지 정규 주전으로 활동한 것을 끝으로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 플레이 스타일 ===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정도의 준족을 지녔고, 몸싸움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근성 있는 모습으로 미드필더 라인에서 돋보인 선수였다고 한다. 여기에 패스 시야와 경기 운영 능력까지 좋아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로 불리며 일본에서 200경기가 넘는 경기 출전을 자랑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노정윤 선수의 플레이를 두고 독일의 특급 미드필더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닮았다 하여 "노테우스"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로 어린 시절부터 대표팀에 차출되었고, 대표팀 감독이 바뀌는 동안 꾸준히 선발되는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ref>꾸준히 선발되긴 했으나, 의외로 호불호는 갈렸던 모양이다. [[김호]] 감독은 노정윤 선수를 체력이 약하고 활동량이 지나치게 많아 효율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으며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아 각종 매체에서 용병술에 대해 지적받은 일이 많았고, 반면 킥앤러쉬를 지향하던 [[차범근]] 감독은 당시 소속팀에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대표팀에 노 선수를 복귀시키며 핵심 선수로 중용하였다.</ref> 현역 시절 매번 지적되는 단점은 공격 성향이 너무 높아 공간을 내주고 공격에만 전념하는 것과 체력이 국내 동 포지션의 다른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고 피지컬이 불안한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천재 플레이 메이커로 불리던 [[윤정환]]과 비교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노정윤 선수가 조금 더 저돌적이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경기를 풀어주는 타입이라면 [[윤정환]] 선수는 정적인 모습이지만 상대 수비가 예상치도 못한 곳에 패스를 넣는 창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한국 플레이메이커는 [[고종수]] 선수가 계보를 이어가게 되었다. 여담으로 현세대에 선수 시절 노정윤과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선수 [[권창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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