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윤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부산 시절 노정윤

노정윤 (1971년 3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하였던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선수 프로필[편집]

  • 이름 : 노정윤
  • 출생일 : 1971년 3월 28일
  • 신체 : 170cm / 74kg
  • 국가대표 경력
1987년 FIFA U-16 세계 선수권대회 본선 대표
1990년 다이너스티컵 본선 대표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대표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본선 대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본선 대표
1999년 99 현대자동차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2000년 AFC 아시안컵 2000 본선 대표
1990년 ~ 200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통산 A매치 45경기 출전 5득점)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 3경기 출전)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 4경기 출전 1득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연도 소속팀 리그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2003 부산 아이콘스 부산 아이콘스 K리그 27 13 2 5 2 0
2004 30 17 4 6 5 0
2005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호랑이 35 35 0 5 4 0
2006 8 8 0 0 0 0
통산 K리그 100 73 6 16 11 0
K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컵 기록 포함. 2016년 8월 1일 기준
연맹 공식 DB


선수 생활[편집]

유소년 생활[편집]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부평중학교와 부평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부평중 시절, 빠른 드리블 돌파와 예리한 킥으로 유소년 축구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는 부평고 진학 후에도 이어져 주축으로 활약하며 부평고의 각종 대회 우승에 핵심 멤버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교 시절인 1987년부터 연령별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고려대 진학 후에도 서정원 선수와 함께 준수한 활약을 통해 성인 대표팀과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호출되는 상승세를 이어가는 과정에 1990년 박종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최순호황보관김주성변병주 등 베테랑 선수들이 포진한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정광석서정원 등의 당시 유망주로 불리던 선수들과 함께 대표팀 막내로 발탁되어 동메달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조별리그에서 파키스탄을 상대로 A매치 첫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1992년 김삼락 감독이 이끄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차출되었으며 모로코파라과이스웨덴과의 조별리그 경기에 출전하였다.[1]


드래프트 거부와 J리그 첫 한국인 선수의 탄생[편집]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동안 각종 대회에서 대표 선수로 활약하면서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노정윤 선수는 K리그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는 대신 1993년 새롭게 출범하는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였다.[2] 이러한 행적으로 노 선수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드래프트를 거부했다는 문제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극심했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3] 그러나 이러한 행보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법으로, 그것은 완산 푸마의 문제였다. 당시 완산 푸마는 1992년 11월에 열리는 드래프트에서 신생팀 자격으로 1순위 지명권을 쥐고 있었고, K리그 드래프트 1991에서 홍명보 선수와 함께 최대어로 불렸으나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황선홍 선수가 독일 진출 후 부상 문제로 국내로 돌아와 K리그 드래프트 1993에 참가할 것을 밝히고 완산 푸마에 지명되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었는데 여기에 노정윤ㆍ김태영강철정재권 등의 대학 무대 드래프트 최대어 선수들 또한 싹쓸이 지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게 되면서 대학 무대 선수들이 동요하게 되었다.[4] 게다가 당시 대학 리그 랭킹 1위를 달리던 정재권 선수가 완산 푸마 입단을 거부하고 실업축구 진출 의사를 밝히게 되면서 차순위인 노정윤 선수의 지명은 확실시되고 말았다.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네덜란드 진출[편집]

그렇게 노정윤 선수는 불안정한 완산 푸마에 지명되는 대신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게 되었다. 산프레체에 입단한 노 선수는 유명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특유의 스피드와 근성으로 첫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 1994년에는 완벽히 프로 무대에 적응하고 10득점을 넣는 대활약으로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깜짝 준우승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 진출 당시 부정적이었던 국내 여론을 뒤집고 김호 감독이 이끄는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어야 할 선수로 김주성과 함께 거론되며 국내에까지 활약상을 전파하였다. 월드컵을 마치고 소속팀으로 돌아온 노 선수는 1995년까지 두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수많은 도움을 기록하면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공격을 풀어주는 선수로 명성을 쌓게 되었으나, 1996년 시즌 중 스포츠 헤르니아 부상으로 전력에 이탈하게 되면서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여 대표팀에서도 멀어지고 말았으며, 1997년에는 12경기 출전에 그치는 아쉬운 활약을 보이고 말았다. 이후 1998년 1월에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퇴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중하위권 팀 NAC 브레다에 계약 기간 1년 6개월과 연봉 약 6억 8천만 원 수준의 호조건으로 유럽 무대 진출에 성공하였다.[5][6] 네덜란드 리그에 입성한 노 선수는[7] 이적 초반부터 팀 데뷔 득점을 을 넣으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여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복귀하는 겹경사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소속팀에서는 점차 활약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었고,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도중 당한 무릎 부상으로 컨디션이 떨어져 1998-99 시즌부터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뒤처지게 되면서 일 년 동안의 네덜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팀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세레소 오사카와 아비스파 후쿠오카 시절[편집]

네덜란드를 떠난 노정윤 선수는 세레소 오사카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고 J리그에 복귀하게 되었고, 당시 세레소 오사카에서 2년 차를 맞이한 황선홍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으며, 득점력은 산프레체 히로시마 시절보다 떨어지지만 노련해진 플레이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윤정환김도근 선수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당시 세레소 오사카는 부진에 빠지는 바람에 김도근과 노정윤 선수를 내보내는 쪽으로 방침을 세우게 되면서 팀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후 K리그 복귀를 타진하게 되면서 울산 현대 호랑이 입단이 확실시되었지만,[8] 9년 전 완산 푸마 입단을 피해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터라 규정에 묶여 무산되고 말았다.[9][10] 그러한 이유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아비스파 후쿠오카에 입단하게 되어서 잔여 시즌도 일본에서 보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약체였던 후쿠오카는 2001년 시즌 종료와 함께 J리그 디비전2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후 2002년 2부 리그였던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주전 선수로 한 시즌 동안 활동하였으나, 시즌 초반 후쿠오카의 서포터즈가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고 노정윤 선수에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던지는 등의 볼썽사나운 행동을 보이자 팀 퇴단을 고민하였고, 구단 수뇌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에 있었던 일이 계기가 되어 시즌 종료와 함께 아비스파 후쿠오카를 떠나게 되었다.[11]


K리그 입성과 은퇴까지[편집]

2001년 규정에 묶여 무산되었던 K리그 진출이 2003년부터 해당 규정이 폐지됨에 따라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인 이안 포터필드가 신임 사령탑에 부임한 부산 아이콘스에 입단하게 되었다.[12] 중고 신인을 넘어 베테랑 신인(?) 자격으로 첫 국내 무대에 입성한 노 선수는 4월 안양 LG와 경기에서 킥오프 23초 만에 데뷔 골을 쏘아 올려 K리그 역대 최단시간 골에 이름을 올리는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빠른 발과 정교한 킥력, 노련미 등을 더해 선수비·후역습을 철저히 고수하던 이안 포터필드 감독 전술에서 역습의 중심으로 나서게 되었고, 이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서 활동량이 적고 압박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쿠키의 견제를 분산시키고 득점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팀 득점을 올리는 역할을 선보였고, 또한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올리기도 하였다. 활약은 2004년까지 이어져 지난 시즌보다 더 좋아진 모습으로 리그에서 30경기 4득점 6도움을 올려 제2의 전성기라 평가받고 부산의 첫 FA컵 우승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후 시즌 종료와 함께 지난 2001년 여름에도 노 선수의 영입을 추진하였던 김정남 감독의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였다. 울산에 입단한 이후로는 선발 스타팅 멤버에서는 내려왔지만, 후반 교체로만 35경기에 출전하며 젊은 선수였던 이천수김진용최성국 등의 선수가 지치면 투입되어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5개의 도움을 올리며 울산의 리그 우승의 조연이 되었다. 이후 2006년까지 울산에 머물렀으나, 축구 선수로 황혼기를 넘어선 나이로 체력 문제가 급격히 오는 이유로 2006년 4월 16일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SK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끝으로 출전 명단에서 빠지며 지도자 과정을 준비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를 선언하였다.[13]


국가대표 생활[편집]

1987년 청소년 대표를 시작으로 2000년 AFC 아시안컵까지 대표팀으로 활약하였다. 성인 대표팀 데뷔는 1990년 다이너스티컵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만 19세의 나이로 출전해 대한민국 A매치 최연소 출장 기록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대표팀 붙박이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여러 감독을 거치는 와중에도 꾸준히 이름을 올려 당시 최고의 게임메이커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약 3년 반이 넘도록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그 시기에는 또 다른 천재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 선수가 대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1998년 4월 15일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슬로바키아와 친선 경기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으며,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라는 이점으로 차 감독 전술의 중심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표팀에서 말년에도 꾸준히 각종 대회에 호출되며 많은 출전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고, 2000년 AFC 아시안컵 본선 조별리그부터 3·4위전인 중국과의 경기까지 정규 주전으로 활동한 것을 끝으로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정도의 준족을 지녔고, 몸싸움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근성 있는 모습으로 미드필더 라인에서 돋보인 선수였다고 한다. 여기에 패스 시야와 경기 운영 능력까지 좋아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로 불리며 일본에서 200경기가 넘는 경기 출전을 자랑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노정윤 선수의 플레이를 두고 독일의 특급 미드필더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닮았다 하여 "노테우스"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로 어린 시절부터 대표팀에 차출되었고, 대표팀 감독이 바뀌는 동안 꾸준히 선발되는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14] 현역 시절 매번 지적되는 단점은 공격 성향이 너무 높아 공간을 내주고 공격에만 전념하는 것과 체력이 국내 동 포지션의 다른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고 피지컬이 불안한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천재 플레이 메이커로 불리던 윤정환과 비교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노정윤 선수가 조금 더 저돌적이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경기를 풀어주는 타입이라면 윤정환 선수는 정적인 모습이지만 상대 수비가 예상치도 못한 곳에 패스를 넣는 창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한국 플레이메이커는 고종수 선수가 계보를 이어가게 되었다. 여담으로 현세대에 선수 시절 노정윤과 가장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선수 권창훈이라고 한다.


은퇴 이후[편집]

2006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울산 측으로부터 코치직을 제의받았으나, 이를 정중히 거절한 뒤 미국 LA로 향했다고 한다. 은퇴 후 2년이 지난 2008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창립 75주년 기념 친선경기에서 일본 OB 대표팀을 상대하는 대한민국 OB 대표로 선발되어 오랜만에 그라운드에 모습을 비추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계속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지도자 과정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피소드[편집]

  • 중고교 시절 골프 선수 출신인 동갑내기 유영옥 씨와 혼인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할 시절에는 아내 유영옥 씨에게 골프를 지도받고 수준급 실력을 자랑했고, 한때 축구보다 골프에 더 빠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이 한창이던 1993년에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4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0-1 패배 후 김호 감독에게 "일본 스파이"라고 방송 인터뷰에 공개적으로 비난받았다는 음모론이 있다고 한다.[16] 문제는, 이러한 역대급(?) 발언이 전해진 자료도 없거니와 해당 경기에서 노정윤 선수는 전반전에 일본 골키퍼와 충돌 후 부상으로 교체된 상태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 김호 감독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뒤에도 산프레체 히로시마 구단 측에게 지속적으로 노정윤 선수의 대표팀 차출 의사를 밝혔다는 점에서 모순점이 존재하는 편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 없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이는 주장이다.
  • 2004년 재일교포 출신 제대일 선수를 추천하여 부산 입단을 이끌기도 하였으나, 결국 입단에 이르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 2010년 한 온라인 게임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7]


경력[편집]

시즌 소속팀 리그 비고
1993 ~ 1998 일본 산프레체 히로시마 J리그
→ 1998 네덜란드 NAC 브레다 에레디비시 임대
1999 ~ 2001 일본 세레소 오사카 J리그 디비전1
2001 ~ 2002 일본 아비스파 후쿠오카 J리그 디비전1J리그 디비전2
2003 ~ 2004 부산 아이콘스 부산 아이콘스 K리그
2005 ~ 2006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호랑이 K리그
선수 생활 은퇴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28년 만의 올림픽 출전으로, 본래 독일 출신 데트마르 크라머 총감독이 지휘하였으나, 크라머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와 불화로 본선 진출을 이루고도 사임하였고, 당시 코치 신분이었던 김삼락 씨가 본선 무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2. 입단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만 해도 에이전트 없이 단신으로 외국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 끝에 합격 받아야 해외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라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고 한다.
  3. 월드컵축구대표 2명 드래프트 신청 거부
  4. 완산 푸마93 한국프로축구대회 참가를 목표로 한 축구단이었는데,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졸속 행정과 창단에 있어서 미흡한 준비 과정, 그리고 재정 문제가 한 곳에 잘 어우러져 불안한 예상이 나왔고, 그 전망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져 1992년 3월 창단 신청 후 딱 일 년 뒤인 1993년 3월 부도처리 되고 말았다. 대학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도 이러한 문제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집단으로 완산 푸마의 지명을 피하고자 실업축구와 해외진출을 모색하였고, 노정윤 선수는 해외진출에 성공한 케이스다. 자세한 내용은 완산 푸마K리그 드래프트 1993 항목 참고.
  5. <축구> 노정윤, 네덜란드 이적, 유럽진출 붐
  6. 1980년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한 허정무에 이어 두 번째 에레디비시 진출이며, 당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임대 이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당시 포항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보였던 라데와 같이 뛰었다고 한다.
  8. 노정윤 '컴백홈'... 울산서 뛴다
  9. 대체 방안으로 미포조선 축구단에 입단하는 것을 제시할 정도로 울산이 강력히 원했었지만, 노정윤 선수 측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라 생각해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10. 노정윤 “내년에 다시 오겠다”
  11. 노정윤, '한국 유니폼 괄시'에 분노
  12. 한국 첫 J리거 노정윤, 부산 입단
  13. 노정윤, '은퇴 임박'…지도자 연수 예정
  14. 꾸준히 선발되긴 했으나, 의외로 호불호는 갈렸던 모양이다. 김호 감독은 노정윤 선수를 체력이 약하고 활동량이 지나치게 많아 효율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으며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아 각종 매체에서 용병술에 대해 지적받은 일이 많았고, 반면 킥앤러쉬를 지향하던 차범근 감독은 당시 소속팀에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대표팀에 노 선수를 복귀시키며 핵심 선수로 중용하였다.
  15. 최대식 선수는 1996년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하였으나, 당시 오이타 트리니타가 아마추어 리그에서 활동하던 때라 고정운 선수가 2호로 불렸고 이후 홍명보 선수가 3호 J리그 진출 선수로 알려졌다.
  16. 이들 주장은 당시 최종 예선이 카타르 도하에서 모두 치러지는데, 노정윤 선수가 일본 숙소에 드나들며 불고기와 김치 등의 음식을 제공하며 팀 정보를 제공했다고 김호 감독이 팀 패배의 책임을 노정윤 선수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축구 다이제스트"라는 잡지 기사에 올렸다는 것인데, 일본어 위키가 편파적인 내용과 신빙성이 부족한 내용이 상당부분 존재함으로 어느 정도 걸러 봐야 될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막은 추가바람.
  17. 축구선수 노정윤, 게임 사업가로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