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9년 친정팀 [[천안 일화 천마]]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안익수는 2005년까지 코치생활을 지속했고, 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냈다.<ref> 대표적인 예로 [[장학영]], [[김철호]], [[박우현]] 등이 있다. 장학영은 연습생에서 국가대표급 수비수로, 박우현등은 2군에만 머물며 방황하던 선수에게 재기의지를 불어넣어 1군 주전선수로 키워냈다. 당연히도 위에 열거한 선수들 모두 안익수 감독을 가장 존경한다고. <del>학영 오빠랑 철호 오빠 제대하고 부산으로 와주세요</del><del>학영오빠는 부산갔는데 익수오빠가 다시 성남왓어요</del></ref> 이후 영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당시 대교 감독이었던 [[최추경]] 감독의 부탁을 받고 고양대교의 코치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최 감독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양 대교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고양대교의 전성기의 토대를 다졌다. 이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민국 여자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있던 안익수 감독은 2010년 [[FC GS]]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였고, 2010년 [[FC GS]]의 K리그 첫 우승을 이끌었다. 동년 11월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내정된 뒤 2011년 부산을 지휘하며 부산축구의 부활을 이끌었던바 있다. 2011시즌 6위, 12시즌 7위를 기록하며 부산을 중상위권 궤도로 올린듯 했는데.. 2012년 12월 뜬금없이 [[성남 일화 천마]] 감독으로 부임해 부산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ref>아직 부산과의 계약기간이 2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성남으로 가버린셈이라 신의를 무엇보다 강조하던 안감독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한데에 부산팬들의 충격이 크다. 여기다 부산 구단주인 [[정몽규]] 선에서 안감독의 성남행이 허락된 것으로 밝혀져 더욱 부산팬들의 황당함은 커져가는 상황이다.</ref> | + | 1999년 친정팀 [[천안 일화 천마]]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안익수는 2005년까지 코치생활을 지속했고, 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냈다.<ref> 대표적인 예로 [[장학영]], [[김철호]], [[박우현]] 등이 있다. 장학영은 연습생에서 국가대표급 수비수로, 박우현등은 2군에만 머물며 방황하던 선수에게 재기의지를 불어넣어 1군 주전선수로 키워냈다. 당연히도 위에 열거한 선수들 모두 안익수 감독을 가장 존경한다고. <del>학영 오빠랑 철호 오빠 제대하고 부산으로 와주세요</del><del>학영오빠는 부산갔는데 익수오빠가 다시 성남왓어요</del></ref> 이후 영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당시 대교 감독이었던 [[최추경]] 감독의 부탁을 받고 고양대교의 코치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최 감독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양 대교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고양대교의 전성기의 토대를 다졌다. 이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민국 여자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있던 안익수 감독은 2010년 [[FC GS]]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였고, 2010년 [[FC GS]]의 K리그 첫 우승을 이끌었다. 동년 11월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내정된 뒤 2011년 부산을 지휘하며 부산축구의 부활을 이끌었던바 있다. 2011시즌 6위, 12시즌 7위를 기록하며 부산을 중상위권 궤도로 올린듯 했는데.. 2012년 12월 뜬금없이 [[성남 일화 천마]] 감독으로 부임해 부산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ref>아직 부산과의 계약기간이 2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성남으로 가버린셈이라 신의를 무엇보다 강조하던 안감독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한데에 부산팬들의 충격이 크다. 여기다 부산 구단주인 [[정몽규]] 선에서 안감독의 성남행이 허락된 것으로 밝혀져 더욱 부산팬들의 황당함은 커져가는 상황이다.</ref><ref>정몽규구단주와의 사이가 갈때까지 갔다 할만큼 멀어진 상태였다고도 한다.</ref> |
| * 수비수로서 프로 통산 200경기 이상 출장하면서도 퇴장은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본인은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을 해하는 플레이보단 기술적인 플레이를 중시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기술 좋은 수비수들을 많이 키워냈다. | | * 수비수로서 프로 통산 200경기 이상 출장하면서도 퇴장은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본인은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을 해하는 플레이보단 기술적인 플레이를 중시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기술 좋은 수비수들을 많이 키워냈다. |
− | * 지도자 커리어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GS 수석코치 시절 멘탈레기인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모조리 뜯어고친 일화이다. <ref> 대표적인 예로 [[김진규]] </ref> 5년간 그 어떤 코치는 물론이고 감독들도 해내지 못한 것을 반년만에 이루어냈다.. | + | * 지도자 커리어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GS 수석코치 시절 멘탈레기인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모조리 뜯어고친 일화이다. <ref> 대표적인 예로 [[김진규]] </ref> 5년간 그 어떤 코치는 물론이고 감독들도 해내지 못한 것을 반년만에 이루어냈다.. <ref>하지만 지도자가 된 이후로는 얄짤없다 맘에 안들면 다 아웃 <<김성환>>이 대표적인 예. 지각 한번으로 이적당했다. 코치시절에는 부각되던 선수들을 갱생시키던 열혈선생다운 모습을 감독이 된 후로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ref> |
| *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여자 클럽팀 최초로 클럽하우스를 건립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 영어교육을 의무화 하였다. 게다가 일화 시절 동료였던 [[신의손]]을 골키퍼 코치로 선임하는 등<ref>참고로 이 신의손 코치의 임명이 한국축구 역사상 첫번째 '''前 [[K리그 외국인선수]]의 한국축구 지도자 임명''' 사례이다.</ref> 여자 축구클럽의 선진화에 기여하였다. | | *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여자 클럽팀 최초로 클럽하우스를 건립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 영어교육을 의무화 하였다. 게다가 일화 시절 동료였던 [[신의손]]을 골키퍼 코치로 선임하는 등<ref>참고로 이 신의손 코치의 임명이 한국축구 역사상 첫번째 '''前 [[K리그 외국인선수]]의 한국축구 지도자 임명''' 사례이다.</ref> 여자 축구클럽의 선진화에 기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