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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익악기'''는 악기제조업체로 1958년 삼익피아노로 창업해 1973년 지금의 상호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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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익악기'''는 악기제조업체로 1958년 삼익피아노로 창업해 1973년 지금의 상호로 변경했다. 2000년대 후반 [[부산 아이파크]]의 스폰서를 맡았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실업축구팀인 '삼익악기 축구단'을 운영한적이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실업축구팀인 '삼익악기 축구단'을 운영한적이 있다.

2014년 4월 28일 (월) 15:17 판

삼익악기 CI

삼익악기는 악기제조업체로 1958년 삼익피아노로 창업해 1973년 지금의 상호로 변경했다. 2000년대 후반 부산 아이파크의 스폰서를 맡았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실업축구팀인 '삼익악기 축구단'을 운영한적이 있다.


삼익악기 축구단

1988년 1월9일, 당시 은행권 축구팀을 제외한 실업 축구팀으로는 12번째로 창단되었다. 창단 이후 각종 실업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만만치 않은 팀으로 평가받았지만, 유독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1] 이후 1991년 겨울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 출신인 정광석을 데려오며 작은 화제를 모으기도 하던 삼익악기 축구단은 1993년 11월 회사 경영사정을 이유로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2]


수상 기록


삼익악기 사커클럽

실업축구팀이 해체된지 7년여 뒤인 2000년, 삼익악기 사커클럽이란 생활체육팀으로 삼익악기는 다시 한번 축구계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사내 8개팀의 축구동아리 중 기량이 출중한 선수를 모아 김유겸[3] 감독이 팀을 구성한다. 이후 각종 직장인 축구대회를 우승하면서 봉신클럽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아마추어 클럽으로 자리잡는다.[4] 2001년 푸티리그와 2002년 FILA배 직장인축구대회 전국결선(청룡부)에서 우승하며 FA컵에도 도전했었지만 01년 대회는 한남대학교 축구부에 0:1로 패배, 02년 대회는 고려대학교 축구부에 1:5로 패하며 아쉽게 FA컵 진출이 무산된바 있다. 이후 삼익악기 사커클럽은 해체된다.


에피소드

  • 2010년 U-17 여자 월드컵에서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섰던 장슬기 선수의 아버지 장영복씨가 전직 삼익악기 선수출신임이 알려져 언론에서 화제가 됐었다.
  • 삼익악기의 훈련장은 인천 계양구(당시 북구) 효성동에 있는 JC공원이었다.


참고

  1. 4강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건데?? 90년 추계, 91년 춘.추계 92년 추계 실업축구연맹전에서 모두 4강에 그치기도 했을 정도.. 주로 할렐루야 축구단, 상무, 중소기업은행에게 발목을 잡혀 우승을 놓치곤 했다.
  2. 1993년 가을 무렵부터 해체설이 돌던 삼익악기 축구단은, 93 군.실업축구대회에 참가신청을 했다가 불참하고 1994년 드래프트 신청에 구 삼익악기 소속 선수 18명이 참가하기에 이르면서 해체가 기정 사실화 되었다. 이후 삼익악기 측은 공식적으로 축구단 해체를 발표하였고, 함께 운영해오던 양궁팀도 해체한다. 일각에서는 1993년 3월 (주)삼익악기 창업주의 타계이후 운영방침의 변화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사원을 7000여명에서 2000여명으로 줄여나가는 힘겨운 시기였던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3. 삼익악기 축구단 시절부터 축구팀 감독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해체 이후 다시 팀을 만들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회사에 남아있었다고.. 삼익악기 사커클럽 창단 당시, 실업팀 시절 선수가 사내에 4명이나 남아있었다고 한다.
  4. 봉신클럽과 더불어 삼익악기가 너무 잘하자 나중엔 경기를 거부하는 인천 아마추어 축구팀이 많았다고 한다.
  5. 전남 드래곤즈대전 시티즌에서 활약한 김종현 선수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