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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버스'''(慶南BUS)는 1966년 설립된 경상남도의 시외버스 업체로 현재의 경남고속이다. 1979년 '''경남버스 축구단'''이라는 초단명 축구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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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버스'''(慶南BUS)는 1966년 설립된 경상남도의 시외버스 업체로 현재의 경남고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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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경남버스 축구단'''이라는 초단명 축구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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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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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추어 축구팀 창단 ==
 
경남버스 축구단(아마추어)의 창단 임원 및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경남버스 축구단(아마추어)의 창단 임원 및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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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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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팀 전환 ==
 
경남버스 축구단은 1979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참가를 목표로 실업 축구팀으로 전환을 선언, [[박병철]], [[정호선]], [[김홍주]]등 우수한 기량의 선수를 스카우트 하고 "[[해군]]" 축구팀 감독을 지냈던 [[유인갑]] 감독과 청소년 대표 코치 출신의 [[장원목]] 코치로 새롭게 스탭진을 구성하면서 야심찬 새출발을 알렸다. 1979년 3월, 대한축구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하면서 부산/경남 지역 실업축구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실업팀 전환과 동시에 [[전국대통령배 축구대회]] 참가를 선언했고,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 예선을 통과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경남버스 축구단은 1979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참가를 목표로 실업 축구팀으로 전환을 선언, [[박병철]], [[정호선]], [[김홍주]]등 우수한 기량의 선수를 스카우트 하고 "[[해군]]" 축구팀 감독을 지냈던 [[유인갑]] 감독과 청소년 대표 코치 출신의 [[장원목]] 코치로 새롭게 스탭진을 구성하면서 야심찬 새출발을 알렸다. 1979년 3월, 대한축구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하면서 부산/경남 지역 실업축구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실업팀 전환과 동시에 [[전국대통령배 축구대회]] 참가를 선언했고,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 예선을 통과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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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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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 ==
그러나 출범 4개월여만인 1979년 7월 31일, 경남버스 신달수 회장은 경남버스 축구단 해체를 발표한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영난을 해체 이유로 들었지만 기존 구단의 견제와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면서 [[조영증]]을 비롯해서 우수 선수들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자 기존 구단의 텃새에 이골이 난 지방 실업구단들이 발을 뺀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했다. 당시 같은 지역의 [[금호산업 축구단|금호산업 축구단(구, 극동철강 축구단)]](부산)이 해체를 결정한 터여서 경남버스의 해체로 지방 실업축구는 크게 위축되고 만다.<ref>부산/경남 지역에 [[동양기계 축구단]](마산)이 있었지만 금호산업과 경남버스에는 전력이 크게 뒤쳐져 있었다. 여기에 동양기계 축구단도 경남버스 축구단 해체 사건 뒤 얼마안가 해체되고 말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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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범 4개월여만인 1979년 7월 31일, 경남버스 신달수 회장은 경남버스 축구단 해체를 발표한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영난을 해체 이유로 들었지만 기존 구단의 견제와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면서 [[조영증]]을 비롯해서 우수 선수들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자 기존 구단의 텃새에 이골이 난 지방 실업구단들이 발을 뺀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했다. 당시 같은 지역의 [[금호산업 축구단|금호산업 축구단(구, 극동철강 축구단)]](부산)이 해체를 결정한 터여서, 경남버스 마저 축구단을 해체하자 지방 실업축구는 크게 위축되고 만다.<ref>당시 부산/경남 지역에는 금호산업, 경남버스 외에도 [[동양기계 축구단]](마산)이 있었지만, 금호산업과 경남버스에는 전력이 크게 뒤쳐져 있었다. 여기에 동양기계 축구단도 경남버스 축구단 해체 사건 뒤 얼마 안가 해체되고 말면서, 1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부산/경남권 실업축구단이 전부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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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8월 9일 경남버스 측이 축구단 해체를 강행하면서 6개월만에 일수로 치면 거의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만에 경남버스 축구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선수단만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버렸는데 당시 대부분의 실업팀이 경기가 극히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구 경남버스 선수들은 그길로 은퇴하고 말았다. 심지어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박병철]] 선수도 이때 하마터면 은퇴할뻔했으나 다행히 홍콩 세미프로 축구팀과 계약이 맺어지면서 홍콩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1984년 [[슈퍼리그]]에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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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8월 9일 경남버스 측이 축구단 해체를 강행하면서 6개월만에 일수로 치면 거의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 만에 경남버스 축구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이 때문에 구 경남버스 선수단은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버렸으며, 당시 다른 실업 축구팀들도 경기가 극히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이들은 그 길로 축구 선수 생활을 은퇴해야만 했다. 심지어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박병철]] 선수도 이 때 하마터면 은퇴할 뻔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홍콩 세미프로 축구팀과 계약이 맺어지면서 홍콩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1984년 [[슈퍼리그]]에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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