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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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은 올림픽 운동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그 운동의 이념으로 제창한 사상으로, "올림픽 참가자는 스포츠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금전전 보상 유무에 따른 사상이다.

오랫동안 올림픽과 스포츠분야에서 지배적인 사상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스포츠 선수들의 금전적인 이해와 재정적인 기반을 통한 실력과 영향력의 향상을 향상을 꾀하는 각 스포츠단체의 요구에 의해 차츰 옅어져 현재에 이르러서는 올림픽 헌장에서 "아마추어(리즘)"라는 단어는 삭제되었으며, 각 스포츠에서도 그 영향력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이 강하던 시기에도 이미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한 기업 아마추어인 실업스포츠를 통해 스포츠를 육성했으며, 금전과 거리가 먼 학원 스포츠조차 소수의 엘리트 선수만이 미래의 대학, 실업스포츠의 선수로의 활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전단계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아마추어리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원[편집]

근대 스포츠는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포츠를 즐기는 중심 계층은 사립학교 및 대학의 학생과 중상위 계층의 부르주아지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스포츠에서 스스로를 아마추어(애호가)라고 불렀으며, 참가규정에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는 부분을 포함시켰으며 금전적 보상을 받는 부류와의 경기도 금지시켰다. 그러한 규정을 정한데에는 당시 스포츠계의 중심이었던 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을 배제하기 위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는 후에 아마추어 및 아마추어리즘이 신분과 직업의 차별에 위한 것이었다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1]

한편, 쿠베르탱는 이러한 아마추어의 사상을 준수하는 한편, 고대 올림픽에서 당초 우승자는 월계관 이외의 영예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으로 올림픽 참가자는 스포츠로 금전적인 보상을 받다서는 안된다는 틀을 마련했으며, IOC는 이를 바탕으로 1901년 아마추어 규정을 통일했다. 규정에 따르면 아마추어가 아닌 것으로 금전적인 것을 위해 경기하는 것, 프로 선수와 함께 경기하는 것, 체육 교사 및 트레이너, 상품의 모델을 하는 참가자가 꼽혔는데 이 중 체육교사 및 트레이너에 관하여 불만이 잇따르자 1905년에 이르러 조건부로 아마추어로 인정되었다.

짐 소프 사건[편집]

초기 올림픽에서 아마추어리즘에 관한 예로 미국의 육상 선수였던 짐 소프의 사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의 10종경기 및 5종경기의 금메달리스트가 된 인디언계 미국인인 소프는 6개월 후 야구 마이너리그에서 플레이 경험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은 후, 1913년 금메달 박탈 및 기록 말소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1982년에 이르러 IOC에서는 소프의 복권을 결정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금메달은 되돌려 줬는데, 복권 이유로는 보통 3개월 이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재심사가 6개월이 지난 후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올림픽에서의 프로스포츠개방에 대한 흐름 때문이었다.

휴업 보상 문제[편집]

노동자 계급의 선수가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 그 기간동안의 임금을 보상해야하는지 여부는 올림픽 초기부터 논란거리로 안고 있었다. 이 건에 관해 국제축구연맹은 그러한 보상을 한 선수도 아마추어가 될 수 있다고 인정했으나 IOC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축구가 실시되지 않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IOC는 오랜 논의 끝에 1962년 헌장 개정을 통해 올림픽 참가 선수에 대한 휴업 보상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은 동시에 프로 용인에 있어 첫걸음이기도 했다.

에이버리 브런디지과 아마추어리즘[편집]

5대 IOC 위원장(1952~1972년)을 지낸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근본주의적 아마추어리즘을 제창하여 "미스터 아마추어"라 불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임 중에 스포츠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화하였으며, 아마추어리즘과의 괴리가 진행했다. 그가 IOC 위원장으로 취임한 1952년에 개최된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흥행을 위해 스포츠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운동선수는 모두 아마추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에 의해 선발된 회원을 전문적으로 훈련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으며, 그들은 오로지 훈련만을 실시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프로페셔널인 이런 선수는 스테이트 아마추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이를 문화적 상대주의로 받아들여 이를 아마추어리즘의 한 부류로 인정하였다.

또한 1962년의 휴업 보상을 인정한 이후로, 서방의 선수도 스포츠에만 전념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지게 되어, 1971년 IOC 총회에서 뮌헨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모든 국가의 선수가 "스테이트 아마추어"화하고 있다는 문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런디지는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의 유지에 집착했다. 알파인 스키를 중심으로, 용품제조업체의 용품 제공과 선전에 선수가 참여하고 있는 동계 올림픽에 대해 그는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동계 올림픽은 향후 폐지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IOC는 삿포로 올림픽 때 오스트리아 알파인스키 선수인 칼 슐란츠에 대해 "이름과 사진을 광고에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마추어 자격 위반으로 간주하고, 개회식 전에 선수촌에서 추방하였다. 이것은 많은 이들의 눈에 본보기의 비쳐졌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해에 퇴임한 부런디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브런디지 이후 6대 IOC 위원장이 된 마이클 킬리닌 남작은 1974년 IOC 총회에서 마침내 올림픽 헌장에서 아마추어 규정을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같이보기[편집]

참고[편집]

  1. 그러나 1844년 공장법의 개정으로 6일중 하루의 반나절을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 참여는 더더욱 늘어갔으며, 1870년대 미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한 영향으로 축구에서도 1885년 축구협회가 금전적인 보상을 허용하였고 1888년 풋볼 리그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는 향후 노동자 중심의 북부팀들이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있어 밑받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