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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소년 생활 == | | == 유소년 생활 == |
− | 1970년 경기도 광주 출생인 서정원은 다니던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어 효창운동장으로 축구를 하러 다녔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는 이천중학교 2학년 재학시절인 1983년 소년체전 선발전에서였다. 당시 거제고등학교 감독이었던 [[유기흥]] 감독은 서정원의 빠른 발을 보고 스카웃을 결정하였고, 서정원은 중학교 졸업 후 거제고등학교로 진학, 기량을 쌓아 나갔다. 유감독의 지휘아래 서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고, 마침내 86년 U-20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서정원을 대학들이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고끝에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서정원은 대학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1990년 월드컵 예비 엔트리에 들었으며,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대표팀은 3무로 8강진출에 실패했지만, 스웨덴 전에서 골을 성공시키는 등 맹활약한 서정원은 유럽팀들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았고, 독일 분데스리가의 레버쿠젠과 입단 성사단계까지 갔으나 병역문제로 인하여 아쉽게 꿈을 접고 말았다. | + | 1970년 경기도 광주 출생인 서정원은 다니던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어 효창운동장으로 축구를 하러 다녔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는 이천중학교 2학년 재학시절인 1983년 소년체전 선발전에서였다. 당시 거제고등학교 감독이었던 [[유기흥]] 감독은 서정원의 빠른 발을 보고 스카웃을 결정하였고, 서정원은 중학교 졸업 후 거제고등학교로 진학, 기량을 쌓아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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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감독의 지휘아래 서정원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고, 마침내 86년 [[대통령배 고교축구선수권대회]] 에서 11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오르며 기량을 증명해보였다. 서정원은 이를 인정받아 U-20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고, 각 급 대표팀에 밥먹듯이 발탁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이런 서정원을 각 대학들이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대우 로얄즈]]에서도 입단제의를 할 정도로 서정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러나 서정원은 장고끝에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고, 대학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1990년 월드컵 예비 엔트리에 들었으며,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대표팀은 3무로 8강진출에 실패했지만, 스웨덴 전에서 골을 성공시키는 등 맹활약한 서정원은 유럽팀들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았고, 독일 분데스리가의 레버쿠젠과 입단 성사단계까지 갔으나 병역문제로 인하여 아쉽게 꿈을 접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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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 | |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 |
| + | 1998년 12월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환한 미소를 드러낸 서정원에게는 수원의 파란색 용비늘 저지가 입혀져있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사정은 이랬다. 1998년 우승을 차지한 수원은 고종수 데니스와 짝을 이뤄줄 테크니션을 찾고 있었고, 국내복귀를 모색하던 서정원을 타깃으로 삼았다. 수원은 서정원에게 당시로서는 최고액인 이적료 50만달러(한화 약 6억원), 연봉 2억원을 제시하였고, 결국 서정원은 수원과 입단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완벽하게 안양을 배신한 것이었다. <ref> 이에 안양 LG측은 7억원의 이적료 반환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서정원은 소송에서 패소하며 3억원을 내줘야만 했다.</ref> 서정원의 수원 입단이 결정되자. 수많은 안양팬들은 분노하였고, 1999년 [[슈퍼컵]]에서 서정원의 유니폼을 불태우며 화끈한 국내복귀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서정원은 이에 감사하다는 듯 후반만을 뛰고도 안양의 수비진을 휘저으며 수원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지지대 더비]]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자. 서정원의 제2 전성기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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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가대표 차출이 더 이상 서정원을 향하지 않게 되자. 서정원은 수원에서 안정적인 기량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고, [[샤샤2|샤샤]]와 [[비탈리]], [[박건하]]도 서정원의 공격을 마무리 해주며, 수원은 1999 시즌 언터쳐블 팀으로 불리며 독주했다. 27경기 11골 5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전관왕을 이끈 서정원은 2000년에는 리그에선 다소 부진하였지만, 컵대회에서 3골을 몰아치며 컵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1년에는 33경기에 나와 11골 2도움을 기록함과 동시에 아시아클럽컵과 아시아클럽챔피언쉽에서 결정적인 승부처마다 골을 집어넣으며 수원의 아시아 재패를 이끌었다. 2002년에도 서정원은 꾸준한 기량을 보여주며 32경기 9골을 기록하였으며, 2003년에는 자신의 시즌 최다 출장인 43경기에 출전하여 10골 5도움을 기록하며,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2003년이 끝나고 [[김호]] 감독이 물러나고, [[차범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서정원의 입지는 다소 좁아졌고, 플레잉코치의 자격을 달고 2004 시즌을 시작했지만, 25경기에 나와 수원의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직후 서정원은 오스트리아 진출을 선언하면서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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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시절 == | | == 해외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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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레이 스타일 == | | == 플레이 스타일 == |
− | | + | 빠른 발을 상대 수비진을 유린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워낙에 빠르고 볼 컨트롤이 좋다보니 상대 수비수들이 미처 발을 뻗기도 전에 서정원은 이미 수비수를 통과해 버릴정도였다. 1999년 부산과의 홈경기에서 수비수 4명을 요리조리 제치면서 사각에서 골을 만들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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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피소드 == | | == 에피소드 == |
| * 발이 하도 빨라 코흘리개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3학년 때는 학년을 하나 속여 4학년 이상 출전하는 광주군(현 광주시) 학년별 육상대회에까지 나가 60m, 멀리뛰기, 높이뛰기 모두 3등 안에 들 정도였다. | | * 발이 하도 빨라 코흘리개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3학년 때는 학년을 하나 속여 4학년 이상 출전하는 광주군(현 광주시) 학년별 육상대회에까지 나가 60m, 멀리뛰기, 높이뛰기 모두 3등 안에 들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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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런 서정원의 주력은 어릴 때부터 남한산성을 매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키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때 키워진 체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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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력 == | | == 경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