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5,783 바이트 추가됨 ,  2012년 12월 14일 (금) 17:15
잔글
편집 요약 없음
54번째 줄: 54번째 줄:  
{{col-3}}
 
{{col-3}}
 
* {{국기그림|대한민국}} [[관동대학교]] 감독 (1993 ~ 1999)
 
* {{국기그림|대한민국}} [[관동대학교]] 감독 (1993 ~ 1999)
 +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 (1993 ~ 2000)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U-23 대표팀|대한민국 U-23]] 코치 (1999 ~ 2002)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U-23 대표팀|대한민국 U-23]] 코치 (1999 ~ 2002)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트레이너 (2002)
+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코치/트레이너 (2002)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구 FC]] 코치 (2003)
+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구 FC]] 수석코치 (2003)
* {{국기그림|대한민국}} [[전남 드래곤즈]] 코치 (2005)
+
* {{국기그림|대한민국}}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 (2005)
 
* {{국기그림|대한민국}} [[동북고등학교]] 감독 (2007 ~ 2009)
 
* {{국기그림|대한민국}} [[동북고등학교]] 감독 (2007 ~ 2009)
 
* {{국기그림|대한민국}} FC GS 2군 감독 (2010)
 
* {{국기그림|대한민국}} FC GS 2군 감독 (2010)
67번째 줄: 68번째 줄: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실 !! 승점 !! [[대한민국 FA컵|FA컵]] !! [[K리그컵|리그컵]]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실 !! 승점 !! [[대한민국 FA컵|FA컵]] !! [[K리그컵|리그컵]]
 
|-
 
|-
! 통산 || - || || || || || || ||  
+
| 2011 || [[경남 FC]] || 8 || 30 || 12 || 6 || 12 || +1 || 44 || 16강 ||bgcolor=bronze| 3위
 +
|-
 +
| 2012 || [[경남 FC]] || 8 || 44 || 14 || 8 || 22 || -10 || 50 ||bgcolor=silver| 준우승 || -<ref>일시 폐지</ref>
 +
|-
 +
! 통산 || - || - || 74 || 26 || 14 || 34 || -9 || 94 ||colspan=2|
 
|}
 
|}
 
{{col-end}}
 
{{col-end}}
79번째 줄: 84번째 줄:  
== 프로 시절 ==
 
== 프로 시절 ==
 
[[파일:최진한1.jpg|200픽셀|섬네일|럭키금성 시절 최진한<br/><del>어째 지금이 더 젊어보여..</del>]]
 
[[파일:최진한1.jpg|200픽셀|섬네일|럭키금성 시절 최진한<br/><del>어째 지금이 더 젊어보여..</del>]]
명지대학교 졸업 후, 당시 [[진주시]]에 연고가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한 그는 럭키금성<ref>LG 치타스 포함</ref>에서 보낸 7시즌동안 151경기에 출장, 21득점 15도움을 기록하며 대활약하였고, 특히 1989년 럭금의 주장을 맡은 뒤, 1990시즌에는 [[윤상철]]과 함께 18골 7도움을 합작<ref>최진한의 기록은 27경기 6골 5도움 '''0경고 0퇴장'''</ref>하며 럭금의 창단 후 첫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1990시즌 MVP까지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1990시즌 최고의 활약을 뒤로 하고 91시즌을 맞이하려던 최선수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된다. 당시 K리그 구단들은 1984년 제정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에 의거해 '''한팀에 입단한 선수는 6년간 소속팀을 바꿀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설사 특정 선수의 6년 계약이 만료된다하여도 원 소속팀이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 포기 이전까지는 다른팀이 선수와 협상할 수 없고, 설사 협상한다해도 그 계약금은 3천만원으로 이하로 한다.''' 는 이면적 담합을 구성했었고, 이러한 선수의 FA 권리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악규정을 근거삼아 럭키금성은 최선수와의 연봉협상에서 낮은 연봉 인상폭을 제시했던 것. 이에 강력 반발한 최선수는 럭금에서 태업을 벌였고,<ref>91년 1월 일본진출까지 선언했었으나, 무산되었던바 있다.</ref> 결국 1991년 7월 럭키금성은 최선수의 방출을 선언한다.  
+
명지대학교 졸업 후, 당시 [[진주시]]에 연고가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한 그는 럭키금성<ref>LG 치타스 포함</ref>에서 보낸 7시즌동안 151경기에 출장, 21득점 15도움을 기록하며 대활약하였다. 1986시즌 후반부 3골을 터뜨리며 팀의 후기 리그 우승에 기여하지만,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며 [[포항제철 아톰스]]의 우승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선수 관리 체계가 잡히지 않아 선수 혼자 재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에 재활이 더디어 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1989년 럭금의 주장을 맡은 뒤, 1990시즌에는 [[윤상철]]과 함께 18골 7도움을 합작<ref>최진한의 기록은 27경기 6골 5도움 '''0경고 0퇴장'''</ref>하며 럭금의 창단 후 첫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1990시즌 MVP까지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1990시즌 최고의 활약을 뒤로 하고 91시즌을 맞이하려던 최선수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된다. 당시 K리그 구단들은 1984년 제정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에 의거해 '''한팀에 입단한 선수는 6년간 소속팀을 바꿀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설사 특정 선수의 6년 계약이 만료된다하여도 원 소속팀이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 포기 이전까지는 다른팀이 선수와 협상할 수 없고, 설사 협상한다해도 그 계약금은 3천만원으로 이하로 한다.''' 는 이면적 담합을 구성했었고, 이러한 선수의 FA 권리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악규정을 근거삼아 럭키금성은 최선수와의 연봉협상에서 낮은 연봉 인상폭을 제시했던 것. 이에 강력 반발한 최선수는 럭금에서 태업을 벌였고,<ref>91년 1월 일본진출까지 선언했었으나, 무산되었던바 있다.</ref> 결국 1991년 7월 럭키금성은 최선수의 방출을 선언한다.  
   −
무직 선수가 된 최선수를 노린 팀은 [[유공 코끼리]]. 하지만 유공은 최선수의 연봉 인상 요구를 럭금과 마찬가지로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최선수는 은퇴까지 고려하다 동년 7월 31일 유공에 입단하기로 결심한다. 씁쓸한 항복선언이었던 셈. 이후 그는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 18경기에 나서 12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
무직 선수가 된 최선수를 노린 팀은 [[유공 코끼리]]. 하지만 유공은 최선수의 연봉 인상 요구를 럭금과 마찬가지로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최선수는 은퇴까지 고려하다 동년 7월 31일 유공에 입단하기로 결심한다. 씁쓸한 항복선언이었던 셈. 이후 그는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 18경기에 나서 12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2시즌, [[김정남]]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고, 당시 코치로 일하던 [[박성화]] 씨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팀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는 1992년 11월 18일, [[대우 로얄즈]]와 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명목상 은퇴 경기로 처리된 듯.
       
== 지도자 생활 ==
 
== 지도자 생활 ==
 +
1992시즌을 마치고 32세의 나이로 유공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최진한은 [[관동대학교]] 감독에 취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지도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바로 감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대학과 프로를 거치며 했던 훈련 과정이 전부였다. 그래서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반복적인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훈련 방식 역시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그 해 청소년 대표팀 코치에 선임되었고, 1999년 국가대표팀 및 올림픽 코치를 맡았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이 종료된 뒤, 청소년 대표팀으로 복귀한 그는 2001년 12월 히딩크 감독의 부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때부터 청소년 대표팀 코치와 대표팀 트레이너를 같이 수행하게 된 최진한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감독이 펼치는 선진 축구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자존심도 버려 가면서 배웠다.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훈련에 나가 사소한 것이라도 다 기록하였다고.<ref>히딩크 감독은 당시 최진한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서 보낸 감시요원인 줄 알았다고.</ref> 그의 열정을 높이 산 히딩크 감독은 편하게 적고 싶은 거 있으면 모두 적으라고 하였고, 최진한은 노트와 녹음기를 챙겨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월드컵때는 라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확인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그 때 당시 빠른 공수 전환, [[포지션 게임]], 전방위 압박 등 세계 축구의 추세에 대해 많이 배웠으며, 이 일을 통해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
월드컵이 종료된 뒤 [[대구  FC]]의 수석코치로 일하며 [[박종환]]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2004년, [[유럽]]의 선진 축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당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잠재력을 보여주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1년동안 머물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UCL, [[유로 2004]] 등 굵직한 대회를 지켜보며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게 되었다. 당시 경험으로 가치관도 변화했는데, 체력은 신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므로, 유소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이 아닌 기술 훈련이라는 것. 유학을 끝낸 후, 2005년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복귀한 그는  2007년 [[동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 2009년 [[고교클럽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상을 수상,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10년 GS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R리그]] 우승을 진두지휘하였다. 점차 명망을 쌓아가던 그는 2011시즌을 앞두고 고향인 [[경상남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 [[경남 FC]]의 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1시즌 [[김주영]] 등의 부상과 [[김태욱]], [[이훈1|이훈]] 등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주축선수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리그 8위를 기록하고 [[K리그컵 2011]] 3위에 오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2012시즌 [[대한민국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아깝게 패배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 업적 및 수상 ==
 
== 업적 및 수상 ==
 +
=== 업적 ===
 +
==== 선수 시절 ====
 +
* {{국기그림|대한민국}} [[럭키금성 황소]]
 +
** [[K리그]] 우승 : 2회 (1985, 1990)
 +
** [[K리그]] 준우승 : 2회 (1986, 1989)
 +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 1회 (1988)
 +
==== 지도자 시절 ====
 +
* {{국기그림|대한민국}} [[경남 FC]]
 +
**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 1회 (2012)
 +
** [[K리그컵]] 3위 : 1회 (2011)
 +
 +
* {{국기그림|대한민국}} FC GS
 +
** [[R리그]] 조 1위 : 1회 (2010)
 +
 +
* {{국기그림|대한민국}} [[동북고등학교]]
 +
** [[고교클럽챌린지리그]] 우승 : 1회 (2009)
 +
 +
=== 수상 ===
 +
==== 선수 시절 ====
 +
* [[K리그 베스트일레븐]] : 1회 (1988)
 +
* [[K리그 MVP]] : 1회 (1990)
 +
==== 지도자 시절 ====
 +
* [[고교클럽챌린지리그]] 최우수 감독상 : 1회 (2009)
 +
 +
 +
== 에피소드 ==
 +
* 동북고등학교 감독 재임 시절 P라이선스를 취득하였다.
 +
* 2012시즌, 침체기를 겪던 경남이 반등하여 멋진 경기력을 펼칠 때, 붉은 속옷을 입었더니 승리한다면서 앞으로 자주 입어야겠다고 밝혔다.
     

편집

3,533

둘러보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