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한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남 FC 감독 시절 최진한

최진한(1961년 6월 22일 ~ 현재)은 대한민국 국적의 미드필더 출신 지도자로, 부천 FC 1995의 제 3대 감독이다.



프로필[편집]

선수 프로필[편집]

  • 성명: 최진한
  • 출생일 : 1961년 6월 22일
  • 신체 조건 : 174cm / 65kg
  • 국가 대표팀 기록 : 대한민국 대한민국 (A매치 11경기 0골)
  • 현 소속 클럽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 연도 리그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럭키금성 황소 럭키금성 황소 1985 K리그 5 3 0 0 0 0 0
1986 23 8 3 4 3 0 0
1987 29 10 2 1 5 0 0
1988 23 7 4 1 1 0 0
1989 38 15 5 4 3 0 0
1990 27 5 6 5 0 0 0
LG 치타스 LG 치타스 1991 6 5 0 1 1 0 0
유공 코끼리 유공 코끼리 1991 18 8 12 0 2 0 0
1992 13 8 2 1 1 0 0
통산 (K리그) 클래식 - 186 72 35 16 16 0 0
K리그 기록은 리그컵 포함. 2012시즌 종료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편집]

  • 지도자 경력
연도 경력
1993 ~ 1999 관동대학교 감독
1992, 2000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 코치
1999 ~ 2002 대한민국 U-23
2002 대한민국 코치 겸 트레이너
2003 대구 FC 수석코치
2005 전남 드래곤즈
2007 ~ 2009 동북고등학교 감독
2010 FC GS 2군 감독
2011 ~ 2013. 05. 22 경남 FC 감독
2014.02.07 ~ 현재 부천 FC 1995
  • 프로 기록
연도 소속 리그 경기 득실 승점 순위 FA컵 리그컵
2011 경남 FC K리그 30 12 6 12 +1 44 8위 16강 3위
2012 44 14 8 22 -10 50 8위 준우승 -[1]
2013 클래식 11 2 6 3 -1 12 중도사임
2014 부천 FC 1995 챌린지
통산 (K리그) 클래식 85 28 20 37 -10 106


선수 생활[편집]

유소년 시절[편집]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최진한은 축구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매주 조기회에 나가 볼을 찼고, 축구장을 순회하며 경기를 찾아다녔다. 그러한 성장 배경이 있었던 덕에 최진한은 아주 어릴적 부터 공을 접하면서 유리창을 수시로 깨먹었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로 축구선수의 길을 택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최선수가 다니던 진주중앙초등학교에는 당시 축구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축구 대신 육상을 시작한 그는 육상을 통해 기초 체력을 다지는 한편, 조광래 등 볼 좀 찬다는 선배들이 다니던 조기회에 나가 공을 찼다. 이후 육상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축구를 하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진주중학교로 전학하여 축구를 시작했다. 남들보다 축구를 늦게 시작해 기본기가 부족해 하루 종일 공만 붙들고 있을 정도로 기본기에 매진했다고.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故 강수길 감독의 지도 하에 진주고 1학년 중 유일하다시피 주기적으로 경기에 출장하며 실력을 쌓았다. 진주고 졸업때 즈음에는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받으며 수많은 실업팀과 대학팀의 관심을 받았고, 최선수는 명지대학교에 진학하게된다. 명지대 시절 초반에는 체력적인 단점을 도출하며 잠시 부진하였지만, 꾸준한 노력 끝에 약점을 보완한 최진한은 대학 4학년때 상무 축구단을 누르고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에서 명지대를 우승시키며 득점왕, MVP를 싹슬이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렇게 공격형 미드필더로 대활약을 펼친 최진한은 1984년 88 올림픽대표팀에도 선발, 메르데카배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프로 시절[편집]

럭키금성 시절 최진한
어째 지금이 더 젊어보여..

명지대학교 졸업 후, 당시 진주시에 연고가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한 그는 럭키금성[2]에서 보낸 7시즌동안 151경기에 출장, 21득점 15도움을 기록하며 대활약하였다. 1986시즌 후반부 3골을 터뜨리며 팀의 후기 리그 우승에 기여하지만,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며 포항제철 아톰즈의 우승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선수 관리 체계가 잡히지 않아 선수 혼자 재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에 재활이 더디어 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1989년 럭금의 주장을 맡은 뒤, 1990시즌에는 윤상철과 함께 18골 7도움을 합작[3]하며 럭금의 창단 후 첫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1990시즌 MVP까지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1990시즌 최고의 활약을 뒤로 하고 91시즌을 맞이하려던 최선수에게 큰 시련이 닥치게된다. 당시 K리그 구단들은 1984년 제정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에 의거해 한팀에 입단한 선수는 6년간 소속팀을 바꿀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설사 특정 선수의 6년 계약이 만료된다하여도 원 소속팀이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 포기 이전까지는 다른팀이 선수와 협상할 수 없고, 설사 협상한다해도 그 계약금은 3천만원으로 이하로 한다. 는 이면적 담합을 구성했었고, 이러한 선수의 FA 권리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악규정을 근거삼아 럭키금성은 최선수와의 연봉협상에서 낮은 연봉 인상폭을 제시했던 것. 이에 강력 반발한 최선수는 럭금에서 태업을 벌였고,[4] 결국 1991년 7월 럭키금성은 최선수의 방출을 선언한다.

무직 선수가 된 최선수를 노린 팀은 유공 코끼리. 하지만 유공은 최선수의 연봉 인상 요구를 럭금과 마찬가지로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최선수는 은퇴까지 고려하다 동년 7월 31일 유공에 입단하기로 결심한다. 씁쓸한 항복선언이었던 셈. 이후 그는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 18경기에 나서 12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2시즌, 김정남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고, 당시 코치로 일하던 박성화 씨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팀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는 1992년 11월 18일, 대우 로얄즈와 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명목상 은퇴 경기로 처리된 듯.


지도자 생활[편집]

경남 FC 감독 이전[편집]

1992시즌을 마치고 32세의 나이로 유공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최진한은 관동대학교 감독에 취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지도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바로 감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대학과 프로를 거치며 했던 훈련 과정이 전부였다. 그래서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반복적인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훈련 방식 역시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1992년 청소년 대표팀 코치에 선임되었고, 1999년에는 국가대표팀 및 올림픽 코치를 맡아 허정무 감독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이 종료된 뒤, 청소년 대표팀으로 복귀한 그는 2001년 12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때부터 청소년 대표팀 코치와 대표팀 트레이너를 같이 수행하게 된 최진한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감독이 펼치는 선진 축구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자존심도 버려 가면서 배웠다.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훈련에 나가 사소한 것이라도 다 기록하였다고 한다.[5] 그 때 당시 빠른 공수 전환, 포지션 게임, 전방위 압박 등 세계 축구의 추세에 대해 많이 배웠으며, 이 일을 통해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게 최감독의 회고.

월드컵이 종료된 뒤 대구 FC의 수석코치로 일하며 박종환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2004년, 유럽의 선진 축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당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잠재력을 보여주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1년동안 머물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UCL, 유로 2004 등 굵직한 대회를 지켜보며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게 되었다. 당시 경험으로 가치관도 변화했다고 한다. 요지는 체력은 신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므로, 유소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이 아닌 기술 훈련이라는 것. 유학을 끝낸 후, 2005년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복귀한 그는 2007년 동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 2009년 고교클럽 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상을 수상,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10년 GS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GS 2군을 R리그 조 1위 등극시키는데 성공하였다.[6]


경남 FC[편집]

점차 성과를 쌓아가던 그는 2011시즌을 앞두고 고향인 경상남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 경남 FC의 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1시즌 김주영 등의 부상과 김태욱, 이훈 등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주축선수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리그 8위를 기록하고 K리그컵 2011 3위에 오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2012시즌 대한민국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아깝게 패배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2013시즌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홈 개막전 부산 아이파크전 승리 이후 연이은 무승행진에 5월 22일 돌연 자진 사임을 선택해 축구팬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부천 FC 1995[편집]

2014년 2월 7일, 곽경근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부천 FC 1995의 3대 감독으로 취임해 부천의 쇄신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4월, 골키퍼 코치 유진회의 선수 폭행 사건이 일어나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평소에 감독이 얼마나 묵인했으면 공개적으로 골키퍼코치가 선수에게 손을 댔을까 하는 의견이 두드러지기 때문. 2015년에도 부천의 지휘봉을 잡고 팀을 이끌어 나갔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자진 사퇴하였다.


업적 및 수상[편집]

업적[편집]

선수 시절[편집]


지도자 시절[편집]

  • 대한민국 FC GS


수상[편집]

선수 시절[편집]


지도자 시절[편집]


에피소드[편집]

  • 2012시즌, 침체기를 겪던 경남이 반등하여 멋진 경기력을 펼칠 때, 붉은 속옷을 입었더니 승리한다면서 앞으로 자주 입어야겠다고 밝혔던바 있다.
  • 프로팀을 맡은 이래 성적 부진을 이유로 자진사퇴하여 팀을 떠났다. 감독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쳐보지 못하고 중도사임했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대목.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일시 폐지
  2. LG 치타스 포함
  3. 최진한의 기록은 27경기 6골 5도움 0경고 0퇴장
  4. 91년 1월 일본진출까지 선언했었으나, 무산되었던바 있다.
  5. 히딩크 감독은 당시 최진한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서 보낸 감시요원인 줄 알고, 처음에는 경계하였으나 이내 최진한 코치의 배우려는 열정을 높이 사은 편하게 적고 싶은 거 있으면 모두 적으라고 하였고, 최진한은 노트와 녹음기를 챙겨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월드컵때는 라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확인할 정도로 노력하였다고 한다.
  6. 또한 이 무렵, P라이선스를 취득하는데 성공하였다.


틀:K리그 MV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