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시즌을 마치고 32세의 나이로 유공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최진한은 [[관동대학교]] 감독에 취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지도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바로 감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대학과 프로를 거치며 했던 훈련 과정이 전부였다. 그래서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반복적인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훈련 방식 역시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그 해 청소년 대표팀 코치에 선임되었고, 1999년 국가대표팀 및 올림픽 코치를 맡았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이 종료된 뒤, 청소년 대표팀으로 복귀한 그는 2001년 12월 히딩크 감독의 부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때부터 청소년 대표팀 코치와 대표팀 트레이너를 같이 수행하게 된 최진한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감독이 펼치는 선진 축구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자존심도 버려 가면서 배웠다.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훈련에 나가 사소한 것이라도 다 기록하였다고.<ref>히딩크 감독은 당시 최진한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서 보낸 감시요원인 줄 알았다고.</ref> 그의 열정을 높이 산 히딩크 감독은 편하게 적고 싶은 거 있으면 모두 적으라고 하였고, 최진한은 노트와 녹음기를 챙겨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월드컵때는 라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확인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그 때 당시 빠른 공수 전환, [[포지션 게임]], 전방위 압박 등 세계 축구의 추세에 대해 많이 배웠으며, 이 일을 통해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 | 1992시즌을 마치고 32세의 나이로 유공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최진한은 [[관동대학교]] 감독에 취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지도자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바로 감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대학과 프로를 거치며 했던 훈련 과정이 전부였다. 그래서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반복적인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훈련 방식 역시 체계적이지 못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그 해 청소년 대표팀 코치에 선임되었고, 1999년 국가대표팀 및 올림픽 코치를 맡았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이 종료된 뒤, 청소년 대표팀으로 복귀한 그는 2001년 12월 히딩크 감독의 부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때부터 청소년 대표팀 코치와 대표팀 트레이너를 같이 수행하게 된 최진한은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감독이 펼치는 선진 축구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자존심도 버려 가면서 배웠다.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훈련에 나가 사소한 것이라도 다 기록하였다고.<ref>히딩크 감독은 당시 최진한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서 보낸 감시요원인 줄 알았다고.</ref> 그의 열정을 높이 산 히딩크 감독은 편하게 적고 싶은 거 있으면 모두 적으라고 하였고, 최진한은 노트와 녹음기를 챙겨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월드컵때는 라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확인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그 때 당시 빠른 공수 전환, [[포지션 게임]], 전방위 압박 등 세계 축구의 추세에 대해 많이 배웠으며, 이 일을 통해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
− | 월드컵이 종료된 뒤 [[대구 FC]]의 수석코치로 일하며 [[박종환]]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2004년, [[유럽]]의 선진 축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당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잠재력을 보여주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1년동안 머물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UCL, [[유로 2004]] 등 굵직한 대회를 지켜보며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게 되었다. 당시 경험으로 가치관도 변화했는데, 체력은 신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므로, 유소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이 아닌 기술 훈련이라는 것. 유학을 끝낸 후, 2005년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복귀한 그는 2007년 [[동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 2009년 [[고교클럽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상을 수상,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10년 GS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R리그]] 우승을 진두지휘하였다. 점차 명망을 쌓아가던 그는 2011시즌을 앞두고 고향인 [[경상남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 [[경남 FC]]의 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1시즌 [[김주영]] 등의 부상과 [[김태욱]], [[이훈1|이훈]] 등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주축선수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리그 8위를 기록하고 [[K리그컵 2011]] 3위에 오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2012시즌 [[대한민국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아깝게 패배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 + | 월드컵이 종료된 뒤 [[대구 FC]]의 수석코치로 일하며 [[박종환]]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2004년, [[유럽]]의 선진 축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당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잠재력을 보여주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1년동안 머물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UCL, [[유로 2004]] 등 굵직한 대회를 지켜보며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게 되었다. 당시 경험으로 가치관도 변화했는데, 체력은 신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므로, 유소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훈련은 체력 훈련이 아닌 기술 훈련이라는 것. 유학을 끝낸 후, 2005년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복귀한 그는 2007년 [[동북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 2009년 [[고교클럽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상을 수상,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10년 GS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R리그]] 우승을 진두지휘하였다. 점차 명망을 쌓아가던 그는 2011시즌을 앞두고 고향인 [[경상남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 [[경남 FC]]의 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1시즌 [[김주영]] 등의 부상과 [[김태욱]], [[이훈1|이훈]] 등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주축선수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리그 8위를 기록하고 [[K리그컵 2011]] 3위에 오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2012시즌 [[대한민국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아깝게 패배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del>이정도면 악연</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