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유소년 시절
'''오인복'''(1938년 2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이다.
== 프로필 ==
{{col-begin}}
{{col-3}}
* 이름 : '''오인복'''
* 출생일 : 1938년 2월 17일
* 국적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 유스클럽 : [[공군사관학교]] 중퇴
* 신체 : 170cm / 67kg (선수 시절)
* 포지션 : [[골키퍼]]
* 국가대표 경력
: [[1964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 대표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 1964년 ~ 197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 '''(통산 A매치 22경기 출장 18실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col-3}}
* 지도자 경력
:{| border=1 cellpadding=4 cellspacing=2 style="background:#FFFFFF; text-align:center; font-size: 95%; border: 1px #aaa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clear:center"
|- style="background:#C0C0C0"
!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80년대 || [[주택은행 축구단]]|| 감독
|-
|}
{{col-end}}
== 유소년 시절 ==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4 후퇴 당시 월남, 이후 인천에 정착하였다. 인천 선인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그 활약을 눈여겨본 [[우상권]] 씨의 추천으로 한양중학교로 전학을 가며 본격적으로 축구계에 이름을 알린다. 이후 당시 고교 최강 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한양공고에 진학해 대활약하였으며, 그의 활약을 눈여겨본 공군사관학교의 스카우트로 사관 생도의 길을 걷게 된다.<ref>당시 공사와 해사는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수들을 의욕적으로 스카우트 하고 있었다. 이 때 오인복 씨 뿐만 아니라 동갑내기인 [[박승옥]] 씨도 해사에 스카우트 되었으나, 종국에는 오씨와 비슷하게 자퇴하게 된다.</ref> 이후 공사 골키퍼 임에도 [[대학선발]]에 발탁되는 등 국내 정상급 골리로 활약하고 있던 오선수에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제의도 들어왔는데, 당시 사관 생도는 국가대표에 발탁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던터라 오씨는 고민 끝에 공사 자퇴를 선택하게 된다.
== 성인 선수 시절 ==
공사를 자퇴한 오씨에게 곧바로 날아든 것은 입대 영장이었다. 당시 국내 최강 축구팀이었던 [[CIC]]가 재빠르게 오인복 선수에게 제의를 넣은 것. 이후 CIC 소속으로 군복무를 마친 오씨는 전역 후 [[금성방직]]에 입사해서는 [[김용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착실하게 기량을 쌓아갔다. 그리고 [[1964년 AFC 아시안컵]]에 발탁되며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으나 이 때는 [[양우식]] 선수에게 밀려 본선 출전을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는 국가대표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메르데카컵]]에 단골로 발탁되었으며<ref>8회 대회부터 15회 대회까지 무려 7회나 참가하였다고..</ref>, [[서울시경]] 소속으로 [[차태성]], [[박승옥]] 등과 함께 국내 무대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이에 1970년 구성된 [[청룡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고 [[주택은행 축구단]] 창단 멤버로 발탁되기도 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다, 1972년 주택은행 축구단의 전국 대회 4관왕 달성에 주역으로 공헌한 뒤 은퇴하였다.
== 지도자 시절 ==
선수 생활 정리 후, 주택은행 복권과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오씨는 1980년께 [[김재한]] 코치와 함께 주택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얼마안가 다시 주택은행 사원 신분으로 돌아가 지점장까지 역임하다가 정년퇴임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는 제2의 고향 격인 인천 축구계의 원로 축구인으로 활동 중이시라고.
== 에피소드 ==
* 국가대표 운이 없는 선수로 통한다. 기량이 한창 물오르던 시절에는 [[함흥철]] 선수에게 밀려서 국가대표 부름을 받지 못했고, [[메르데카컵]]에 불박이로 발탁되며 국가대표 1군에 올라서는듯 했으나, [[이세연]]이라는 벽에 막혔다..
* 금성방직 시절 김용식 선생이 오인복 씨에게 골키퍼로써 갖춰야할 소양으로 '팀을 리드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골키퍼하면 순발력과 공중볼을 따낼 체격 등 하드웨어만 강조하는 터였는데, 수비 리딩과 커뮤니케이션 역할 등을 강조한 김용식 선생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 이러한 가르침 때문인지, 오인복 씨는 당대 골키퍼 중 가장 시끄러운 선수로 기억되었다고 한다..
* 골키퍼 뿐만 아니라 필드 플레이어도 소화할 수 있는 만능 자원이었다. [[스트라이커]]와 [[하프백]],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고. 한번은 실업축구대회에서 스트라이커로 출전해 골을 집어넣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오인복 씨의 형인 오인건 씨도 축구 선수 출신으로 전매청과 조선전업 소속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조선전업 시절 김용식 선생과 인연을 맺어 동생인 오인복 씨의 금성방직 입단을 주선하였다고..
== 같이 보기 ==
== 외부 링크 ==
== 참고 ==
<references/>
[[분류:1938년생]][[분류:한양공고의 선수]][[분류:실업축구 선수]][[분류:실업축구 지도자]][[분류:축구 패밀리]]
== 프로필 ==
{{col-begin}}
{{col-3}}
* 이름 : '''오인복'''
* 출생일 : 1938년 2월 17일
* 국적 : {{국기그림|대한민국}} '''[[대한민국]]'''
* 유스클럽 : [[공군사관학교]] 중퇴
* 신체 : 170cm / 67kg (선수 시절)
* 포지션 : [[골키퍼]]
* 국가대표 경력
: [[1964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 대표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 1964년 ~ 197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 '''(통산 A매치 22경기 출장 18실점)'''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col-3}}
* 지도자 경력
:{| border=1 cellpadding=4 cellspacing=2 style="background:#FFFFFF; text-align:center; font-size: 95%; border: 1px #aaa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clear:center"
|- style="background:#C0C0C0"
!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80년대 || [[주택은행 축구단]]|| 감독
|-
|}
{{col-end}}
== 유소년 시절 ==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4 후퇴 당시 월남, 이후 인천에 정착하였다. 인천 선인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그 활약을 눈여겨본 [[우상권]] 씨의 추천으로 한양중학교로 전학을 가며 본격적으로 축구계에 이름을 알린다. 이후 당시 고교 최강 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한양공고에 진학해 대활약하였으며, 그의 활약을 눈여겨본 공군사관학교의 스카우트로 사관 생도의 길을 걷게 된다.<ref>당시 공사와 해사는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수들을 의욕적으로 스카우트 하고 있었다. 이 때 오인복 씨 뿐만 아니라 동갑내기인 [[박승옥]] 씨도 해사에 스카우트 되었으나, 종국에는 오씨와 비슷하게 자퇴하게 된다.</ref> 이후 공사 골키퍼 임에도 [[대학선발]]에 발탁되는 등 국내 정상급 골리로 활약하고 있던 오선수에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제의도 들어왔는데, 당시 사관 생도는 국가대표에 발탁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던터라 오씨는 고민 끝에 공사 자퇴를 선택하게 된다.
== 성인 선수 시절 ==
공사를 자퇴한 오씨에게 곧바로 날아든 것은 입대 영장이었다. 당시 국내 최강 축구팀이었던 [[CIC]]가 재빠르게 오인복 선수에게 제의를 넣은 것. 이후 CIC 소속으로 군복무를 마친 오씨는 전역 후 [[금성방직]]에 입사해서는 [[김용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착실하게 기량을 쌓아갔다. 그리고 [[1964년 AFC 아시안컵]]에 발탁되며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으나 이 때는 [[양우식]] 선수에게 밀려 본선 출전을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는 국가대표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메르데카컵]]에 단골로 발탁되었으며<ref>8회 대회부터 15회 대회까지 무려 7회나 참가하였다고..</ref>, [[서울시경]] 소속으로 [[차태성]], [[박승옥]] 등과 함께 국내 무대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이에 1970년 구성된 [[청룡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고 [[주택은행 축구단]] 창단 멤버로 발탁되기도 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다, 1972년 주택은행 축구단의 전국 대회 4관왕 달성에 주역으로 공헌한 뒤 은퇴하였다.
== 지도자 시절 ==
선수 생활 정리 후, 주택은행 복권과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오씨는 1980년께 [[김재한]] 코치와 함께 주택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얼마안가 다시 주택은행 사원 신분으로 돌아가 지점장까지 역임하다가 정년퇴임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는 제2의 고향 격인 인천 축구계의 원로 축구인으로 활동 중이시라고.
== 에피소드 ==
* 국가대표 운이 없는 선수로 통한다. 기량이 한창 물오르던 시절에는 [[함흥철]] 선수에게 밀려서 국가대표 부름을 받지 못했고, [[메르데카컵]]에 불박이로 발탁되며 국가대표 1군에 올라서는듯 했으나, [[이세연]]이라는 벽에 막혔다..
* 금성방직 시절 김용식 선생이 오인복 씨에게 골키퍼로써 갖춰야할 소양으로 '팀을 리드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골키퍼하면 순발력과 공중볼을 따낼 체격 등 하드웨어만 강조하는 터였는데, 수비 리딩과 커뮤니케이션 역할 등을 강조한 김용식 선생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 이러한 가르침 때문인지, 오인복 씨는 당대 골키퍼 중 가장 시끄러운 선수로 기억되었다고 한다..
* 골키퍼 뿐만 아니라 필드 플레이어도 소화할 수 있는 만능 자원이었다. [[스트라이커]]와 [[하프백]],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고. 한번은 실업축구대회에서 스트라이커로 출전해 골을 집어넣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오인복 씨의 형인 오인건 씨도 축구 선수 출신으로 전매청과 조선전업 소속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조선전업 시절 김용식 선생과 인연을 맺어 동생인 오인복 씨의 금성방직 입단을 주선하였다고..
== 같이 보기 ==
== 외부 링크 ==
== 참고 ==
<references/>
[[분류:1938년생]][[분류:한양공고의 선수]][[분류:실업축구 선수]][[분류:실업축구 지도자]][[분류:축구 패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