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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경신중학에 입학한 후, [[김영근]]<ref>당시 김영근 씨는 김용식 씨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경신중학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ref>, [[채금석]] 등 전설적인 플레이어들과 함께 경신중학에서 크게 활약한 김용식 씨의 명성은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김용식, 김영근 등이 주축이된 [[조선축구단]]은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와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일본팀들을 잇달아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런 활약에 아연실색한 일본 축구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본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김용식과 김영근은 나란히 발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식민지민 조선인에 대한 팀내 차별에 반발한 김영근은 일본 올대를 스스로 떠났고, 김용식 씨는 차별을 계속 이겨내며 올림픽대표로 베를린을 밟았다. [[손기정]] 씨를 비롯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조선인이나 일본 국적을 달고 뛴 7인 중 한명이 바로 김용식 씨였던 것이다.
 
1927년 경신중학에 입학한 후, [[김영근]]<ref>당시 김영근 씨는 김용식 씨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경신중학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ref>, [[채금석]] 등 전설적인 플레이어들과 함께 경신중학에서 크게 활약한 김용식 씨의 명성은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김용식, 김영근 등이 주축이된 [[조선축구단]]은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와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일본팀들을 잇달아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런 활약에 아연실색한 일본 축구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본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김용식과 김영근은 나란히 발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식민지민 조선인에 대한 팀내 차별에 반발한 김영근은 일본 올대를 스스로 떠났고, 김용식 씨는 차별을 계속 이겨내며 올림픽대표로 베를린을 밟았다. [[손기정]] 씨를 비롯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조선인이나 일본 국적을 달고 뛴 7인 중 한명이 바로 김용식 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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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올림픽대표 감독이었던 다케노고시는 1936년 8월 4일 스웨덴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김용식 씨에게 '내일 잘 싸워라' 라는 말과 함께 선발 출장기회를 부여했다. 당시 전반에만 2골을 스웨덴에 내주며 끌려가던 일본은 후반 20분까지 2골을 몰아치며 2:2 동점 상황을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는데, 후반 40분경 일본에게 패널티킥 찬스가 왔다. 워낙 중요한 찬스라 다들 패널티킥을 차기 주저하던 상황, 이때 김용식 씨가 '내가 차겠다' 고 앞으로 나섰고, 김용식의 킥은 스웨덴의 골문을 여는 한방이 되었다.<ref>여기서, 기록과 증언이 갈리는데 1971년 월간축구와 인터뷰한 김용식 씨는 결승골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기억하고 계셨던 반면, FIFA에 남은 기록에는 당시 결승골 득점자는 Akira Matsunaga 다.</ref> 경기를 극적인 3:2 역전승으로 마무리지은 일본 대표팀은 김용식 씨에게 앞다투어 지금까지의 차별과 질시에 대한 사과를 하기에 바빳고, 이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각 대학들이 김용식 씨를 스카우트 하려 혈안이 되게 만드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후 와세다대학에 잠시 진학하였던 김용식 씨는 국내로 복귀하여 신문기자 생활등을 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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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올림픽대표 감독이었던 다케노고시는 1936년 8월 4일 스웨덴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김용식 씨에게 '내일 잘 싸워라' 라는 말과 함께 선발 출장기회를 부여했다. 당시 전반에만 2골을 스웨덴에 내주며 끌려가던 일본은 후반 20분까지 2골을 몰아치며 2:2 동점 상황을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는데, 후반 40분경 일본에게 패널티킥 찬스가 왔다. 워낙 중요한 찬스라 다들 패널티킥을 차기 주저하던 상황, 이때 김용식 씨가 '내가 차겠다' 고 앞으로 나섰고, 김용식의 킥은 스웨덴의 골문을 여는 한방이 되었다.<ref>여기서, 기록과 증언이 갈리는데 1971년 3월호 월간축구와 인터뷰한 김용식 씨는 결승골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기억하고 계셨던 반면, FIFA에 남은 기록에는 당시 결승골 득점자는 Akira Matsunaga 다.</ref> 경기를 극적인 3:2 역전승으로 마무리지은 일본 대표팀은 김용식 씨에게 앞다투어 지금까지의 차별과 질시에 대한 사과를 하기에 바빳고, 이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각 대학들이 김용식 씨를 스카우트 하려 혈안이 되게 만드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후 와세다대학에 잠시 진학하였던 김용식 씨는 국내로 복귀하여 신문기자 생활등을 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 광복 이후 활동과 6.25 ==
 
== 광복 이후 활동과 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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