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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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1910년 7월 25일 ~ 1985년 3월 8일) 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축구인이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국 축구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지는 분이다.


유소년 시절[편집]

1910년 7월 25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생한 김용식 씨는,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 김용식 씨의 아버지 되시는 김익두 씨는 중국, 상해 등지를 돌아다니는 목사의 신분이라 김용식 씨는 어릴적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며 성장했고, 신천초등학교 시절부터 볼을 차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1922년 서울로 이사와 YMCA 학교에 입학한 김용식 씨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비교적 축구경기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2] 경성부에서 김용식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훗날 한국축구계의 거두가 되는 채금석 씨 등과 만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편집]

1927년 경신중학에 입학한 후, 김영근[3], 채금석 등 전설적인 플레이어들과 함께 경신중학에서 크게 활약한 김용식 씨의 명성은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김용식, 김영근 등이 주축이 된 조선축구협회대표팀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일본 팀들을 잇달아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런 활약에 아연실색한 일본 축구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본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김용식과 김영근은 나란히 발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올림픽대표팀 내에는 식민지민인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던 터라, 이에 반발한 김영근 씨는 스스로 일본 올대를 떠났고, 김용식 씨는 이런 차별을 계속 이겨내며 기어코 베를린을 밟는데 성공하였다. 즉 손기정 씨를 비롯,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국적을 달고 뛴 조선인 7인 중 한명이 바로 김용식 씨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올림픽대표팀 감독이었던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義)는 1936년 8월 4일 스웨덴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김용식 씨에게 '내일 잘 싸워라' 라는 말과 함께 선발 출장 기회를 부여했다. 당시 전반에만 2골을 스웨덴에 내주며 끌려가던 일본은 후반 20분까지 2골을 몰아치며 2:2 동점 상황을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는데, 후반 40분경 일본에게 패널티킥 찬스가 왔다. 워낙 중요한 찬스라 다들 패널티킥을 차기 주저하던 상황, 이때 김용식 씨가 '내가 차겠다' 고 앞으로 나섰고, 김용식의 킥은 스웨덴의 골문을 여는 한방이 되었다.[4] 경기를 극적인 3:2 역전승으로 마무리지은 일본 대표팀은 김용식 씨에게 앞다투어 지금까지의 차별과 질시에 대한 사과를 하기에 바빳고, 이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각 대학들이 김용식 씨를 스카우트 하려 혈안이 되게 만드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후 와세다대학에 잠시 진학하였던 김용식 씨는 국내로 복귀하여 신문기자 생활등을 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활동과 6.25[편집]

광복 후, 평양과 경성을 오가며 1939년 만주사변 이후 명맥이 끊겼던 축구를 다시 부흥시키는데 힘쓰던 김용식 씨는 교통부 축구단 창단 시도[5] 를 거쳐, 1946년 조선전업 (지금의 한국전력) 축구단을 당대 최강의 팀으로 재편성하였고 선수 자격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도 참가하였다. 런던 올림픽 참가 이후, 김용식 씨는 조선전업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다 갑작스럽게 6.25를 맞이하게 된다. 미처 피난을 갈 틈도 없이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 김용식 씨를 서울에 주둔해있던 인민군들은 가만두질 않았다. 얼마안가 손기정 씨 등과 함께 북한 인민군에 잡혀 고초를 치루었으며,[6] 이후 간신히 서울을 빠져나와 친척집에서 숨어지내며 6.25 시기를 버텨내었다.


축구계에서의 활동[편집]

1952년 43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김용식 씨는,[7]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1953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54년 FIFA 스위스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통부 축구단, 한국전력, 금성방직, 양지, 신탁은행, 할렐루야 독수리 등에서 지도자로 맹활약한 김용식 씨는 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면서 축구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며 존경을 받았다.


사망[편집]

1981년 국내 최초의 프로팀 할렐루야 감독을 맡아 프로축구 발전에 이바지하였던 김용식 씨는 1983년 5월부터 순환기 장애로 치료를 받다 1985년 3월 8일 새벽 1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김용식 씨에게는 체육훈장 맹호장이 추서되었으며, 영결식은 축구인장으로 효창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여담으로 훗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이유형 씨와는 고향 동갑내기 친구 사이다. 신천군 시절부터 두 사람은 함께 어울리며 볼을 차고 놀았다고..
  2. 주로 동네끼리 돈을 걸고 내기 경기를 하는 류의 경기들이었다.
  3. 당시 김영근 씨는 김용식 씨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경신중학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4. 여기서, 기록과 증언이 갈리는데 1971년 3월호 월간축구와 인터뷰한 김용식 씨는 결승골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기억하고 계셨던 반면, FIFA에 남은 기록에는 당시 결승골 득점자는 마쓰나가 아키라(松永行)다.
  5. 본래 조선철도국 축구단이라 하여 광복 이전부터 축구팀이 존재하였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재창단하였으나 경비 문제로 불과 6개월여만에 해체되었다. 결국 교통부 축구단은 6.25 이후에나 재건되기에 이른다.
  6. 당시 손기정 씨등과 함께 인민군에 잡혀가니, 주요 체육계 인사 상당수가 잡혀와 앞으로 인민군에 협조하고 반공을 색출하는데 앞장서라는 회유를 받으셨다고 한다.
  7. 원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한국 선수로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경비 문제로 본선 진출이 불발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헬싱키 올림픽 문서 참고. 만약 이 때 출전이 이루어졌다면, 역대 최고령 A매치 출전 기록이 탄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