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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팀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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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 ~ 1992 || [[대우 로얄즈]]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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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 ~ 1992 || {{팀|대우}}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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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수석코치
 
| 1992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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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 1994|| [[대우 로얄즈]] || 감독<ref>대행기간 포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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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 ~ 1994|| {{팀|대우}} || 감독<ref>대행기간 포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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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 1997||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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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 1997|| {{팀|수원|1996}} || 수석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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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 2003|| [[안양 LG 치타스]] || rowspan="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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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 2003|| {{팀|안양|1999}} || rowspan="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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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FC 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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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팀|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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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2010||[[경남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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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2010||{{팀|경남|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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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 201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 2010 ~ 201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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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 현재 || [[대구 FC]]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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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 현재 || {{팀|대구|2013}}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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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시절 =
 
= 지도자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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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 수원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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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ㆍ수원 시절 ==
 
대우 로얄즈의 수석 코치로 일하던 그는 199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이차만]]의 뒤를 이어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지만, 3시즌 동안 리그컵 3위 2회 이외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수석 코치로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지만, 감독 승계권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며 수석 코치직에서 사임한 뒤, 수원의 라이벌 [[안양 LG 치타스]] 감독에 부임하였다.
 
대우 로얄즈의 수석 코치로 일하던 그는 199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이차만]]의 뒤를 이어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지만, 3시즌 동안 리그컵 3위 2회 이외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수석 코치로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지만, 감독 승계권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며 수석 코치직에서 사임한 뒤, 수원의 라이벌 [[안양 LG 치타스]] 감독에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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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스타일 ==
 
== 지도 스타일 ==
선수단과 훈련할 때도 호흡을 같이하며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다. 과거에는 수많은 선수들을 윙백으로 전환시켜 '''윙백덕후'''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축구유학을 다녀온 이후 짜임새 있는 티키타카형 축구를 경남에 적용시켰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이와 같은 스타일을 정착시키려 했다.<ref>이 무렵 조광래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적 역할을 주로 해외파 선수들이 수행하여,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이 조장되었다는 일부 비판도 있다. 당시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지동원]]과 핵심 미드필더 [[구자철]], [[이용래]]의 소속팀을 보자면 앞서 말한 주장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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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과 훈련할 때도 호흡을 같이하며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다. 다만 이게 과해서 자기 개성이 강한 선수들(특히 외국인 선수 <del>[[뚜따]]라든가</del> 와 충돌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과거에는 수많은 선수들을 윙백으로 전환시켜 '''윙백덕후'''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축구유학을 다녀온 이후 짜임새 있는 티키타카형 축구를 경남에 적용시켰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이와 같은 스타일을 정착시키려 했다.<ref>이 무렵 조광래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적 역할을 주로 해외파 선수들이 수행하여,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이 조장되었다는 일부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시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지동원]]과 핵심 미드필더 [[구자철]], [[이용래]]의 소속팀을 보자면 앞서 말한 주장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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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적 및 수상 =
 
= 업적 및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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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던 시기에 해외파 중심으로 선발 라인업을 꾸린다는 등의 이유로 대표팀 파벌 논란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2011년 아시안컵 당시 주전으로 뛰었던 [[지동원]]이나 [[구자철]], [[이용래]] 등이 국내파였다. 또한 2014년 12월 [[기성용]]이 한 인터뷰의 내용에 따르면, 아시안컵을 준비하던 당시 기성용과 [[윤빛가람]]을 비교하면서, 당시 폼이 좋았던 윤빛가람을 더욱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기성용에게 대놓고 '반쪽짜리 선수는 싫다'라며 직설적으로 말하여 기성용이 마음 단단히 먹고 아시안컵을 준비했다고. <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news&mod=read&office_id=260&article_id=0000000937 : (매거진S) 기성용 "지금의 나는 다르다"]</ref>
 
*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던 시기에 해외파 중심으로 선발 라인업을 꾸린다는 등의 이유로 대표팀 파벌 논란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2011년 아시안컵 당시 주전으로 뛰었던 [[지동원]]이나 [[구자철]], [[이용래]] 등이 국내파였다. 또한 2014년 12월 [[기성용]]이 한 인터뷰의 내용에 따르면, 아시안컵을 준비하던 당시 기성용과 [[윤빛가람]]을 비교하면서, 당시 폼이 좋았던 윤빛가람을 더욱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기성용에게 대놓고 '반쪽짜리 선수는 싫다'라며 직설적으로 말하여 기성용이 마음 단단히 먹고 아시안컵을 준비했다고. <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news&mod=read&office_id=260&article_id=0000000937 : (매거진S) 기성용 "지금의 나는 다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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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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