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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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감독 시절 조광래

조광래 (1954년 3월 19일 ~ 현재)는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출신 감독이다.


프로필[편집]

선수 프로필[편집]

  • 성명 : 조광래 (趙廣來, Cho Kwang-Rae)
  • 출생일 : 1954년 3월 19일
  • 신체조건 : 169cm / 64kg[1]
  • 주로 쓰는 발 : 오른발
  • 국가대표 기록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예선 대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예선 대표
1980년 AFC 아시안컵 본선 대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대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본선 대표
1977년 ~ 1986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A매치 95경기 15골)
  • 현 소속팀 : 선수 생활 은퇴
  • K리그 기록
소속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경고 퇴장 자책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1983 15 1 2 1 3 0 0
1984 13 6 1 1 1 0 0
1985 5 1 0 2 1 0 0
1986 9 2 0 0 1 0 0
1987 4 3 0 0 1 0 0
통산 (K리그) - 46 13 3 4 7 0 0
K리그 기록은 K리그 컵 포함. 2012년 4월 14일 기준.
연맹 공식 DB


지도자 프로필[편집]

  • 지도자 경력
연도 경력
1987 ~ 1992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수석코치
199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수석코치
1992 ~ 1994 대우 로얄즈 대우 로얄즈 감독[2]
1995 ~ 1997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석 코치
1999 ~ 2003 안양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감독
2004 FC GS FC GS
2008 ~ 2010 경남 FC 경남 FC
2010 ~ 201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2014 ~ 현재 대구 FC 대구 FC 단장


  • 감독 기록
소속 연도 리그
순위
리그컵 FA컵 수퍼컵 대륙대회
대우 로얄즈 1992 7 14 9 5위 조별예선 예선 - -
1993 10 0 22 6위[3] 3위 예선 - -
1994 7 6 17 6위[4] 3위 예선 - -
안양
LG 치타스
1999 11 0 22 7위 2위
(아디다스배)
8강 준우승 -
조별예선
(대한화재배)
2000 19 0 14 우승 조별예선 8강 - 8강
2001 11 10 6 준우승 조별예선 8강 우승 -
2002 11 7 9 4위 예선 - 준우승 준우승
2003 14 14 16 8위 -[5] 32강 -[6] -
FC 서울 2004 7 12 5 5위 16강 - - -
경남 FC 2008 10 5 11 8위 조별예선 준우승 - -
2009 10 10 8 7위 조별예선 예선 - -
2010 10 5 3 중도사임 4강 예선 - -
통산 (K리그) 115 83 142 리그 우승 1회, ACL 준우승 1회

선수 시절[편집]

유소년 생활[편집]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진주 봉래초등학교와 진주중학교, 진주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쳤다. 남들보다 축구를 늦게 시작한 조광래 감독은 당시 입학 시험을 치르던 시절, 시험을 치러 지역 명문인 진주중과 진주고에 진학할 정도로 우수한 두뇌와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조광래는, 1973년 진주고를 건국대학교 총장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춘계고교축구연맹전, 전국체전 고교부 우승으로 이끌며 3관왕의 자리에 오르게해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168cm 의 단신에도 불구, 문전에서의 집중력과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대학 스카우터들의 교섭 대상이 된 조씨는 건국대학교연세대학교의 치열한 경합 끝에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성인 무대[편집]

연세대 졸업 후, 당시 실업축구팀이었던 포항제철에 입단하였고, 상무 축구단을 거쳐 1982년 대우 로얄즈와 계약하면서 1983년 출범하게 된 슈퍼리그 무대에 입성하였다. 특유의 근성과 날카로운 패스를 주무기로 활약하던 그는 프로 첫 시즌에 K리그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프로 2년차인 84년에는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하였다. 로얄즈에서 K리그 우승 2회, FA컵 준우승 1회,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1회를 거두는 데 공헌한 그는, 1987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였으며 이후 대우의 수석 코치로 부임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지도자 시절[편집]

대우ㆍ수원 시절[편집]

대우 로얄즈의 수석 코치로 일하던 그는 199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이차만의 뒤를 이어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지만, 3시즌 동안 리그컵 3위 2회 이외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수석 코치로 김호 감독을 보좌하였지만, 감독 승계권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며 수석 코치직에서 사임한 뒤, 수원의 라이벌 안양 LG 치타스 감독에 부임하였다.


안양 LG 치타스 감독 시절[편집]

1999년 안양의 감독 자리에 오른 조광래는 대한민국 수퍼컵 1999 타이틀을 따내며 감독 생활을 시작하였고, 리그에서는 9위로 부진하였지만 리그컵에서 준우승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그리고 2000년에는 19승 0무 14패를 기록, K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오르며 단숨에 K리그 주요 감독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01년 수퍼컵에서 우승하였지만 K리그에서 11승 10무 6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준우승을 기록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야말로 안양의 최고 황금기를 일궈낸 감독이 조광래였던 것.[7] 2002년에는 또다시 수퍼컵을 준우승하고콩라인... 리그 4위를 기록하면서 상위권 전력을 유지했지만 2003년 리그 8위에 FA컵 32강에 그치며 예년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GS의 연고이전 원년 감독으로 리그 12위, 리그컵 16강이라는 팬들의 대실망을 이끌어 내면서 LG 프랜차이즈의 감독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경남 FC 감독 시절[편집]

K리그 2007시즌을 끝내고 대표이사와 홍역으로 동반사임한 박항서 감독의 후임으로 경남 FC 감독에 선임되었다.[8]2008시즌 4월, 함안종합운동장에서 열린 FC GS와의 홈 경기에서 GS의 득점이 오프사이드로 무효 선언이 되자, GS 선수들이 항의하여 득점으로 인정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에 따라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기가 28분 지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당시 선수단을 경기 구역 밖으로 내보낸 감독의 잘못도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한 심판진의 행동도 문제가 있었다. 2008년 중반까지는 K리그 챔피언십 진출권과 리그컵 플레이오프 진출권, FA컵에서의 연전연승 등 3개 대회에서 모두 인상적인 결과를 낼 뻔 했으나 2008년 마지막 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당한 3-1 역전패와 하나은행 FA컵 2008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패하는 등 아쉽게도 결과를 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2008시즌까지 쓰려고 했던 까보레가 이적 논란 끝에 도쿄로 떠나고, 뽀뽀마저 레이솔로 떠나 버린 입장에서 김진용, 정윤성, 김동찬, 그리고 당 시즌 화려하게 떠오른 서상민 등 국내파 공격수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 낸 성과라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있다. 특히 프로 입성 후 자리를 잡지 못하며 방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김동찬이 FA컵에서 완벽하게 부활하며 경남의 믿고 쓰는 공격수로 성장한 것이 가장 가시적인 성과. 이후 2009시즌에는 기존에 있던 산토스 등 주축 선수들을 내보내고 K리그 드래프트 2009에서 지명한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꾸려 가게 된다. 시즌 초반까지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후반기 김동찬의 대활약과 이용래, 김주영, 송호영 등 신인들이 성장하면서 대약진, 2010년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2010년 상반기 윤빛가람루시오를 영입하면서 공격 전개 루트를 추가한 조광래 체제의 경남은 2010년 5월 2일까지 9경기 무패 행진을 내달리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리그 1위를 기록, 중위권에 머무를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9] 하지만 2010년 7월 28일, 허정무 감독의 후임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에 오르며 경남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광래 감독과 경남은 K리그 2010 종료까지 대표팀과 경남 감독을 겸임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이 요청을 거절하여 경남 감독직에서 내려 오게 되었다.그리고 축협은 후임 감독 부임때는 겸임 제의를 하였다. 이 무슨 후임으로는 정식 감독이 선임되지 않았고, 수석 코치 김귀화가 감독 대행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감독이 경남을 버리고 국대에 갔다는 의미로 감패[10]로 부르는 경남 팬들이 있는데, 제 얼굴에 먹칠 하는 꼴. 실제 조감독은 끝까지 경남과 겸임하기를 원했으며 국대 감독이 된 이후에도 당시 김영만 대표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구단 고문에 올랐고, 현재도 팀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남fc는 조광래 유치원이라고 불린다.

경남에서 조광래 시대의 의의는 유망주를 주축으로 하여 아기자기한 빌드업을 주 무기로 하는 전술을 통해 성적을 내고, 그 유망주가 팀을 떠나면 그 자리를 새로운 유망주가 메운다는 경남의 팀 컬러를 갖춘 데 있다. 실제로 최진한 시대까지 팀의 주축이 된 김인한, 김주영, 윤빛가람 등 다수의 선수들이 혜성처럼 K리그에 등장하여 이름을 알렸고, 안양 시절 조광래의 아이들이라는 말에 이어 조광래 유치원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젊고 매력 있는 선수들의 활약과 조감독 특유의 아기자기한 전술, 거기에 2010년 새롭게 입성한 창원축구센터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경남은 폭발적인 관중 증가세를 보여 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민구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국가 대표팀 감독 부임[편집]

2010년 7월 21일, 허정무감독의 후임으로 국가대표팀 사령탑이 된다. 중위권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었던 경남 FC를 이끌고 리그 1위를 한 것이 선임 이유일 듯. 국가대표팀과 더불어 경남 FC 감독직을 겸임할 것을 원했으나, 대한축구협회가 이를 거절하면서 국가대표팀 감독직만을 수행하게 된다.[11] 취임 당시 "이제 어떤 강호와 맞붙어도 주눅 들지 않는 경기력을 갖춰야 한다. 투지, 체력, 조직력 외에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축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며 대표팀 운영방식을 언급하였다. A매치 이후 이청용은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는데 경기장에서 실제로 나타내기는 어려움이 있다' 라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이른바 "만화축구"라고 불리우는 조광래 감독의 전술이 대표팀에 적용되려는 순간이었다.

2011년 1월에 열린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을 맡은 지 6개월밖에 되지않은 조광래 감독의 대한민국 대표팀은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보여온 한국식 축구와는 차별화 된 대한민국대표팀식 티키타카를 선보였고, 아시안컵 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3위를 기록한다. 아시안컵 3위 감독의 저주(?)[12]를 벗어나 아시안컵 이후에도 유임되었다. [13]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 은퇴를 시사한 박지성이영표의 공백을 메움과 동시에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본선티켓을 거머쥐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석현준윤빛가람, 손흥민, 남태희, 홍정호, 김영권, 서정진, 홍철, 윤석영, 이상덕 등 어린 선수들 위주의 대표팀 선수들을 소집하여 리빌딩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무렵 2012 런던올림픽 대회를 준비하던 홍명보감독과 선수선발 과정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14] [15] 2011년 3월 29일 몬테네그로와 평가전이 돌연 취소되어 대구 FC와 연습경기를 갖는 해프닝도 발생하였다.


국가 대표팀 감독 사임 이후[편집]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한 이후에는 FC 바르셀로나와 협약, 고향인 경상남도 진주FC 바르셀로나 조광래 축구교실을 창립하여 유소년을 길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2013시즌 초반 경남의 최진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감독 생활이 위태로워지자 조감독을 찾는 팬들의 목소리가 늘어났고, 경남의 감독 후보군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언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단은 일리야 페트코비치를 선임하며 조광래의 감독 부임설을 일축하였다. 그리고 2014년 8월 29일 대구 FC의 단장직을 맡으며 지도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 K리그 무대에 복귀하는데 성공하였다. 대구 단장 취임 이후, 이영진, 안드레, 손현준 등 과거 안양 시절 함께하였던 스탭진들을 끌어모으며 대구 FC의 부흥을 이끌기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지도 스타일[편집]

선수단과 훈련할 때도 호흡을 같이하며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다. 다만 이게 과해서 자기 개성이 강한 선수들(특히 외국인 선수 뚜따라든가 와 충돌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과거에는 수많은 선수들을 윙백으로 전환시켜 윙백덕후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축구유학을 다녀온 이후 짜임새 있는 티키타카형 축구를 경남에 적용시켰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이와 같은 스타일을 정착시키려 했다.[16]


업적 및 수상[편집]

국가대표팀[편집]


클럽[편집]


개인[편집]


에피소드[편집]

  • 1980년대 초반 차범근이 독일 무대에서 맹활약할 당시, 독일 축구팀들은 한국 선수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 중에서도 컴퓨터 링커로 국가대표를 책임졌던 조광래를 향해 러브콜이 제법 많이 들어왔었다.[17] 하지만 조광래는 1981년까지 군복무를 수행해야하는 상황이었고, 대우 측이 계약금만 1억원을 부르며 조광래의 한국 잔류를 설득한 점, 여기다 당시에는 '해외진출 = 국가대표의 의무를 저버리는 비애국자(?)' 라고 생각하던 묘한 분위기가 축구선수들 사이에 있어서 결국 조광래는 해외진출을 고사하고 말았다.
  •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최초의 월드컵 본선무대 자책골 기록을 갖고있다. (1986년 6월 10일 멕시코월드컵 조별리그) [18]
  • 팬들에게 은근히 잘 한다. 경남 FC 감독 시절 팬들이 클럽하우스에 훈련을 보러 가면 "밥 먹고 가라"며 기어이 클하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고 가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눈으로 넘어가는지
  •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던 시기에 해외파 중심으로 선발 라인업을 꾸린다는 등의 이유로 대표팀 파벌 논란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2011년 아시안컵 당시 주전으로 뛰었던 지동원이나 구자철, 이용래 등이 국내파였다. 또한 2014년 12월 기성용이 한 인터뷰의 내용에 따르면, 아시안컵을 준비하던 당시 기성용과 윤빛가람을 비교하면서, 당시 폼이 좋았던 윤빛가람을 더욱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기성용에게 대놓고 '반쪽짜리 선수는 싫다'라며 직설적으로 말하여 기성용이 마음 단단히 먹고 아시안컵을 준비했다고. [19]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선수 시절 기록이다.
  2. 대행기간 포함
  3. 6개 클럽
  4. 7개 클럽
  5. 미개최
  6. 미개최
  7. 96년 9개팀 중 8위, 97년 10개 팀 중 9위, 98년 10개 팀 중 8위, 99년 10개 팀 중 9위를 기록하던 팀을 2000년에 단숨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물론 구단의 적극적 지원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적이긴 하지만, 지원을 등에 업고도 하위권을 맴돌던 유수의 감독들을 생각하면 조광래의 업적은 대단한셈.
  8. 사실, 조광래감독의 선임 소식이 알려질 때만 하더라도 공격적인 능력을 갖춘 선수는 측면으로 돌려 수비력을 갖추게 하여 전술적으로 더 유용하게 만든다 는 윙백덕후 기질 때문에 넷상에서 까보레는 최고의 윙백 과 같은 개드립이 난무하였다.
  9. 혹자는 K리그가 추춘제로 진행되었다면 2009/10시즌의 챔피언은 경남 FC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0. 감독질 패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1. 관련기사 : '겸임 안돼?' K리그 배려없는 축구협회
  12. 아시안컵에서 3위를 기록한 감독들은 사퇴 또는 사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아시안컵 3위를 기록한 핌 베어백 감독. 무승부 경기에 승부차기로 꾸역꾸역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다 3위를 기록하게 된 경기력때문에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결국 사임했다.
  13. 아시안컵 본선경기 전승가도를 달리다 4강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승부차기 접전 끝에 패배하였다. 경기력 자체로만 보면 "한국축구도 이런 경기를 보여줄 수 있구나!"라는 반응과 좋은 경기력 등이 맞물려 유임할 수 있었던 듯.
  14. (연합뉴스 - 이동칠 기자) 조광래-홍명보, 3월2일 회동..축구대표 차출 조율
  15. 국가대표팀 세대교체를 감행한 조광래호의 어린 선수들이 청소년대표팀과 런던올림픽대표에도 명단을 올리는 선수들이었고, 어린 선수를 혹사시키지 않도록 대표팀차출에 신경을 더 써야한다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 분위기를 다시 곱씹어보면 23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 런던올림픽에서 메달을 따 병역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6. 이 무렵 조광래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적 역할을 주로 해외파 선수들이 수행하여,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이 조장되었다는 일부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시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지동원과 핵심 미드필더 구자철, 이용래의 소속팀을 보자면 앞서 말한 주장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17. 여기에는 차범근의 적극적인 추천도 한몫했다.
  18. 당시 이탈리아 공격수 알토벨리가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이 2-3으로 분패했던 경기이다. 경기 당시에는 알토벨리의 득점으로 인정되었으나 이후 조광래의 자책골로 기록이 변경되었다.
  19. : (매거진S) 기성용 "지금의 나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