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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 | | ==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 |
|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중동고 출신 선수들을 확인하려면 [[:분류:중동고등학교의 선수]]를 클릭할 것. | | 중동고는 1928년 축구부를 창단하였으며, 197,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삼성재단의 후원 아래 인조잔디 구장을 구비하는 등 내실을 꾀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있다. 중동고 출신 선수들을 확인하려면 [[:분류:중동고등학교의 선수]]를 클릭할 것. |
| + | 우리 나라에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아래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
| + | 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중동학원은 1927년 백농 최 |
| + | 규동 선생께서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살리고자 축구ㆍ농구ㆍ유도부를 창단함으로 |
| + | 써 중동의 찬란한 축구 역사가 시작됐다. |
| + | 중동 축구의 역사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한 근거 자료가 그리 많지 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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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중동100년학원사에서 밝히는 |
| + | 중동체육사 와는 달리 동문사에서는 다소 경직된 기록위주가 아닌 인물 중심의 활 |
| + | 약상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본인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 |
| + | 해해 주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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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초기의 중동 축구 |
| + | 한국 축구의 시작은 1920년대 초 외국 선교사들이 각종 구기를 소개, 지도하며 그 |
| + |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중동 축구팀이 창설된 1928년 무렵 당시의 축구계는 평양의 |
| + | 숭실, 서울의 경신 등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
| + | 중동 축구는 1928년 조선 신궁대회 예선에서 강호 경신과 대전했다. 이 대회에 |
| + | 처음 출전한 우리 중동은 애석하게도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경기가 신예 중동 |
| + | 축구가 서서히 그 기반을 굳혀 나가는 첫 발걸음이 됐다. |
| + | 이후 중동 축구는 모든 면에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착실한 훈련을 통해 많은 |
| + | 발전을 가져와 1934년 조선체육회 창설 15주년 종합경기대회에서는 준우승이라는 |
| + | 성적을 올리며 그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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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71년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그때의 멤버들은 다음과 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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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 골키퍼 윤형섭, 풀백 최창흠ㆍ박명선, 하프백ㆍ최인모ㆍ |
| + | 전지경ㆍ신일근, 포드 강주세ㆍ김진옥ㆍ천갑손ㆍ전흥주 등이다. |
| + | 이러한 첫 실적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중동 축구의 모습을 탄생을 조심스 |
| + | 럽게 보여주었고, 1937년에 들어서 6중학 축구연맹전과 경성제대 주최 축구대회에 |
| + | 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중동 축구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 + | 이후 중동 축구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38년 보성전문 주 |
| + | 최 제11회 중등대회 준우승, 같은 해 전全조선축구대회 겸 전일본축구 예선 대회에 |
| + |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1939년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전국축구대회 우승 |
| + | 을 차지했다. |
| + | 우승컵을 안고 경성 역에 도착한 선수들을 전교학생들이 무등을 태워 본교까지 |
| + | 행진하고 본교 운동장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님께서 황소를 잡아 전교생이 파티를 |
| + | 했다고 한다. |
| + | 백농 선생 따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선생께서는“다음에는 이 기쁨을 백두산 |
| + | 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의 감정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
| + | 그 당시의 진용을 보면 이시동, 박건섭, 이기주, 정형식, 곽정빈, 정인호, 이강열, |
| + | 이범태, 유명석, 최병섭, 하진용 동문이 활약했다. |
| + | 특히 38회 이시동 동문은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축구부원으로 활약하며 |
| + |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선수로 출전했었고,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홍콩 프로팀의 |
| + | 선수로 스카우트 되는 등 초창기 중동 축구의 상징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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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치신궁대회 중동군의 우승을 알리는 |
| + | 신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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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한 38회 이기주당시 국가대표 동문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
| + | 건달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이기주 동문은 축구뿐만 아니라 주먹으로도 한국 축구계 |
| + | 에서 유명했다. 이기주 동문이 한 신문기자와 식사 중 담배 불로 기자의 이마에 상 |
| + | 처를 냈다. 이유는 너무 말이 많고 아는 척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
| + | 또 중동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상대 선수를 경기중에 심판 몰 |
| + | 래 축구화로 밟은 일도 있을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다. 그의 아들이자 축구부 후배인 |
| + | 74회 이우광 동문도 아버지를 宣?축구도 잘했지만 주먹도 만만치 않았다. |
| + | 일본 메이지明治신궁 축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중동 축구는 1940년 한국조선대 |
| + | 표로 전일본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일본의 사미쓰상업ㆍ도꾸시마상업ㆍ우라와중 |
| + | 학ㆍ메이세이상업 등 당시 일본 학생 축구의 최강팀을 차례로 격파하며 전일본 선 |
| + | 수권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
| + | 우리 국민의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축구로 잠시나마 잊게 해 준 중동 축구는 |
| + | 이러한 여세를 몰아 국내에서 열린 조선종합축구대회와 제13회 중등 축구대회, |
| + | 조선신궁경기 등 전국 단위의 고교 선수권대회에서 보성, 양정, 배재 등 당대의 |
| + | 강팀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하는 빛나는 전적을 올려 중동 축구의 위상을 한껏 드 |
| + | 높였다. |
| + | 그러나 1940년대 일본의 압정과 전쟁 등으로 우리 나라의 각종 구기는 없어지 |
| + | 고 젊은이들의 근로동원,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축구를 비롯한 모든 체육계가 침체 |
| + | 되는 아픈 시기를 맞아 우리 중동 축구도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어둠으로 가라 |
| + | 앉게 됐다. |
| + | 하지만 당시 어려운 시기에 우리 중동 축구를 거쳐 간 수많은 동문들은 중동 축 |
| + | 구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축구 발전의 한 축을 맡았던 사실 |
| + | 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 + |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의 특성은 당시 가난했던 민중들에 |
| + | 게 큰 호응을 받았으며,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굳센 체력과 강인한 투쟁심은 우리 |
| + | 국민의 정서와도 일치했으며, 더불어 중동인의 사자 정신과도 일치했다. |
| + |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 |
| + | 한 청량제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고, 중동 축구는 그 |
| + |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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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빠져 나온 중동 축구는 |
| + | 새로운 세상을 맞아 더욱 성숙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 |
| + | 주기 시작했다. 1945년 열린 해방 경축 종합대회인 5 |
| + | 개 지역 축구대회에서 중동 축구는 강호 배재, 보성, |
| + | 중앙, 휘문 등과 함께 기량을 겨뤄 우승을 차지했다. |
| + | 당시 39회 이범태, 최병섭, 이강열이상 월북, 신현수, |
| + | 하진용 동문들의 실력은 대표선수 이상이었다. 특히 |
| + | 38회 하진용 동문은 당시 서대문 주먹계에도 널리 알 |
| + | 려져 시합 중에 상대선수가 하진용 동문에게 태클을 |
| + | 한 다음 일어서서‘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기도 |
| + | 했다고 전한다. |
| + | 하지만 이렇게 특출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수들이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
| + | 선수로 뽑히지 않자 이강열 동문이 북한에서 열리는 축구시합에 나가자 해서 북으 |
| + | 로 올라갔다가 6.25전쟁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
| + | 이 일로 인해 국가에서는 이들을 사상불순자로 오해해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
| + | 가장 많이 스카우트했던 고려대학교에서 중동 출신 축구선수를 한동안 뽑지 않는 |
| + |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로 진학한 동문들이 많다고 |
| + |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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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기서 잠시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에 대해 살펴본다면 한국 축구계를 짊어지 |
| + | 고 온 핵심세력을 연세대와 고려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세력의 모태 |
| + | 를 보면 중동을 비롯해 배재ㆍ경신고등학교 출신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
| + | 일만 보아도 중동 축구는 한국축구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보아도 과언은 |
| + | 아닐 것이다. |
| + | 다시 월북 사건으로 돌아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록 사상불순자로 오해를 사기 |
| + | 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중동 축구가 북한 축구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게 된다. 39 |
| + | 회 최병섭 동문은 북한 청소년대표코치를, 39회 이범태 동문은 북한축구협회 심판 |
| + |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범태 동문의 동생인 44회 이범창 동문 역시 중동 축구 선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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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형제가 모두 중동 축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
| + | 하지만 중동 축구는 많은 역경을 이기고 팀을 재정비해 1946년 제1회 전국축구 |
| + | 선수권 대회 우승, 서울시 기념대회 우승, 1947년 제2회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
| + | 이라는 성적을 올려 해방 후 새롭게 중동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
| + | 이후 거침없는 연승 가도를 달린 중동 축구는 1948년 학도체육대회 서울예선 |
| + | 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고 1949년에는 제1회 전국 학도 |
| + | 체육대회 우승과 함께 다시 한 번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해 중동 축구의 놀라 |
| + | 운 실력을 입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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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당시 주축선수로는 42회 오완건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명환전 모교 축구감독, 김 |
| + | 형배, 김돈해, 김포경, 강석영, 김석봉 동문 등이 있었고 또한 그해 1948년 런던올림 |
| + | 픽 국가대표선수로 38회 이시동 동문이 출전해 중동 축구를 세계로 알리는데 큰 몫 |
| + | 을 했다. |
| + | 특히 오완건 동문은 27년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대한축구협회의 역 |
| + | 사이기도 하다. |
| + | 또 김명환 동문은 10여 년간 무보수로 모교를 위해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많은 |
| + |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시키고 모교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1975년과 1976년 전 고 |
| + | 교축구 대회를 석권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후 국민대학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 |
| + | 서 국민대학교를 정상에 올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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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0년 보스톤마라톤 제패 기념 축구대회에서 경신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
| + | 한 중동 축구는 같은 해 6월 20일 전국학도호국단대회가 6.25전쟁 발발로 중단된 이 |
| + | 후 전쟁 중에 펼쳐진 약간의 대회에 참가는 했으나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
| + | 상처에 의해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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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25전쟁으로 인해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44회 신동호 동문은 당시 공격수로서 |
| + | 별명이 오토바이일 정도로 대표선수 이상의 기량이었으나 6.25전쟁 중 전투에서 전 |
| + | 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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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동 축구는 6.25전쟁 중에 유니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원래 중동의 유니폼은 |
| + | 전통의 노란색으로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6.25전쟁이 나자 노 |
| + | 란색 원단을 구하지 못해 흰색 상의와 청색 하의 유니폼을 착용한 적이 있었다. 타 |
| + | 학교 학생들은 중동의 노란색 유니폼만 보아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노란색 유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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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폼은 누구나 중동 축구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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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동 축구는 6.25전쟁 전에 이룩한 성적에 비해서는 약간의 침체기를 겪었다. |
| + | 그러나 1954년 1월 한국 국가대표팀의 동남아 원정 당시 본교 48회 정형식, 이기주, |
| + | 김영일 동문 등이 활약해 중동 축구의 위상은 계속 이어졌다. |
| + | 걋?해 중동 축구는 그간의 부진을 극복하고 7월에 거행된 전국축구선수권대 |
| + | 회에서 영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서울시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다시 한 번 도약을 |
| + | 시작하며 빛나는 중동 축구인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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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청룡기 전국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8회 이우현전 MBC |
| + | 해설위원ㆍ전 국가대표, 장충준전 국회의원, 장대덕전 모교 축구OB 회장, 김상진ㆍ한영기ㆍ고 |
| + | 흥균ㆍ박귀상ㆍ엄경진ㆍ전용덕이상 전 국가대표, 이만우, 심재완 동문 등이 활약해 우 |
| + | 승을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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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48회 이우현 동문은 초대 서울 체육고등학교 축구부 코치와 MBC 해설위원 등 |
| + | 을 지내면서 많은 축구교재를 발간했다. 또한 서울 체고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해설 |
| + | 위원인 이용수, 신문선, 강신우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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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5년을 거쳐 1956년에 이르러 중동 축구는 중동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록될 |
| + | 오관왕五冠王의 해를 맞는다. 당시 50회가 주축으로 활약한 중동 축구는 학도체육대 |
| + | 회 서울 예선에 첫 우승을 거둔 후 전국체전 축구 예선과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제 |
| + | 37회 전국체전, 전국고교축구대회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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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올려 우리 나라 축구계를 경악케 하는 쾌거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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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6년에는 당시 주축선수로는 50회 이계근전 서울체고 감독, 김승환, 유현철한국 |
| + | 최초 독일 유소년축구 프로그램 도입ㆍ88올림픽 조직위원ㆍ현 효성그룹 고문, 최귀인전 모교 축구감 |
| + | 독), 유판순(전 모교축구감독ㆍ전 명지대 감독, 이동훈전 공군사관학교 감독, 이수덕, 최종국 등이 |
| + | 5관왕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동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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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0회 기수는 축구도 잘했지만 명물도 많았다. 특히 우리 중동 축구의 명물 50회 |
| + | 유판순본명 유종원 동문의 일화가 유명하다. 대표선수시절 일본과의 시합 중 벤치에 |
| + | 있었던 유판순은 우리 나라가 일본 대표팀에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본인 스 |
| + | 스로 감독의 허락도 안 받고 교체멤버로 출전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한다. 명지대학 |
| + | 교 감독 시절에는 관중들이 시합보다도 감독의 욕하는 모습을 더 재미있게 본 시절 |
| + | 도 있었다. |
| + | 50회 유현철 동문은 한전 축구단 감독으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모교 |
| + | 후배들을 한전 축구부로 영입해서 대표선수로 키웠는데 74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가 |
| + | 대표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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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0회 장충준은 축구선수로는 흔치 않게 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50회 최 |
| + | 종국 동문은 당시 중동 축구의 센터포워드로 전국 고교랭킹 1위였으나 아쉽게도 주 |
| + | 먹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졸업 당시 영등포 삼일당의 벽돌 기습으로 큰 |
| + | 사고를 당하기도 한 그는 이후 명동의 신상사와 지금까지 한국 주먹계의 큰형님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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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로 불려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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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7년에도 역시 중동 축구는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체전 서울예선 |
| + | 준우승, 서울시 4대 고교 축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올려 그 해 열린 말레이시아 라 |
| + | 만 수상컵 쟁탈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를 대비해 결성한 첫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차 |
| + | 경복전전 성남 일화프로축구감독, 강창선, 이낙원, 박경구 등 중동 선수가 7명이나 선발 |
| + | 되는 영광을 누렸다. |
| + |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 하고 중동 축구는 이후 10년 가까이 침 |
| + | 체기를 갖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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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68년에 중동 축구는 서서히 재기에 성공해 그 해 거의 10년 만에 종합선수권 |
| + | 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멤버를 보면 61회 나성수, 62회 원홍재, 조한흥이상 전 청소년 |
| + | 대표, 63회 고재욱전 모교감독ㆍ전 국가대표 현 관동대학교 축구감독, 64회 황재만전 국가대표 등 |
| + | 을 비롯해 서대기, 김상희전 청소년대표 오우석, 김종철현 모교 체육교사, 65회 한병호ㆍ |
| + | 박용덕ㆍ박동식이상 전 청소년대표, 66회 이종설전 청소년대표, 67회 장기문전 국가대표 동 |
| + | 문 등이 활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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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진용은 다음 해까지 계속 이어져 1969년 제18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
| + | 서 종합 전적 6승으로 전국의 강호 16팀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
| + | 이 대회에서 우승해 한ㆍ일 교환경기의 대표권을 얻은 중동 축구는 일본 아끼 |
| + | 다상고 대표팀을 11대0으로 대파하는 등 화려한 전적을 남겼다. |
| + | 당시 60~70년대 중동축구를 빛낸 동문들은 53회 전상준전 청소년대표, 황정일20년 |
| + | 간 중동중고등학교 축구부감독, 54회 김상구전 국가대표, 오근영전 대전상고 감독, 심근택전 모교 |
| + | 감독, 55회 홍인웅전 국가대표, 안원남전 국가대표, 주민환전 국가대표, 56회 김호엽전 국가대 |
| + | 표, 임충웅전 청소년대표, 서재학전 청소년대표, 57회 조명철현 OB축구회 회장, 이 관전 청소년 |
| + | 대표, 이충남전 청소년대표, 58회 조중연전 청소년대표ㆍ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59회 김원태전 |
| + | 청소년대표, 송영준전 청소년대표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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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3회 황정일 동문은 20여 년간 중동중학교 감독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 |
| + | 고 특히 이번 100년사에 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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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8회 조중연 동문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지난 2002년 월드컵을 |
| + |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주역 중에 주역으로 모교 축구감독 과 현대 프로축구단 감독 |
| + | 도 역임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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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4회 오근영 동문은 대전상고 축구부 감독을 하면서 한국축구계의 유명한 골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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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이태호 선수를 배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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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3회 고재욱 동문은 대표선수 시절 한전과의 경기 중 무릎 부상으로 화려한 대 |
| + | 표선수를 마감하고 영남상고 축구부 감독에 부임한 다음 모교 축구 감독으로 부임 |
| + | 해 다음해 전국고교축구대회 4개중 3번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
| + | 또한 고재욱 동문은 한국 축구계에 특별한 스타급 선수를 배출시키는데 75회 |
| + | 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학교 감독과 비운의 스타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
| + | 축구감독 동문을 배출했으며, 이후 럭키금성 프로축구단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며 팀 |
| + | 을 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1년과 1995년에는 한국국가대표팀 감독으로 |
| + | 활약하다 현재는 관동대학교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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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4회 황재만 동문은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10여 년간 한국 대표팀 부동의 수 |
| + | 비수로 롱킥 과 롱드로잉, 거친 태클로 유명했다. 이후 할레루야 축구단 선수 및 코 |
| + | 치 , 감독을 지내며 프로축구 원년 우승의 영광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원인모를 |
| + | 병으로 투병중인 황재만 동문은 굴하지 않는 사자정신으로 현재 한국 장애인럭비협 |
| + | 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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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7회 장기문 동문은 별명이 검은 장갑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상대 팀 선수들이 |
| + |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중동의 정신인 사자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
| + | 으로 생각된다. |
| + | 1970년대 들어 다시 한 번 중동 축구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974년에 들어 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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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의 저력을 과시하던 중동 축구는 다시 한 번 전국의 모든 패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
| + | 누리게 된다. |
| + | 중동 축구는 그해 춘계연맹전, 건대총장배 대회, 대통령금배, 추계연맹전, 경부 |
| + | 고교 축구대회 등에서 모두 우승하는 쾌거를 올려 중동 축구의 역사를 잇는 성적을 |
| + | 올린다. |
| + | 이 같은 중동 축구의 빛나는 성적을 이룬 원동력은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
| + | 오직 모교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운동장을 누비던 선수들과 지도자의 힘이 크다. |
| + | 1970년대 중동 축구부가 사용했던 운동장은 운동장 상태 |
| + | 와 시설이 매우 열악해 일명‘미아리 운동장’이라는 별칭을 |
| + | 얻을 정도였고, 작은 동산을 없애고 선수들이 직접 운동장을 |
| + | 만들었으나 운동장이 고르지 못해 매일 선수들이 돌을 주워 |
| + | 나르면서 축구연습을 했다. |
| + | 이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고생하는 축구부 선수들을 |
| + | 위해 돈을 모아 돼지를 기르기 시작었다. 매일 저녁 미아리 일 |
| + | 대 식당에서 돼지 밥을 구해 양육을 하던 어느 날 그 유명한 |
| + | 유판순 동문이 모든 돼지를 선수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 잡았 |
| + | 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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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처럼 축구 연습만 해도 모자랄 선수들이 운동장을 고르고 돼지를 키우는 등 |
| + |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고 수많은 국가대표선수들이 배 |
| + | 출했던 것은 중동인의 정신, 바로 사자정신을 나타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
| + | 또한 1975년 제68회 대통령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와 연 |
| + | 장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승리했다. 우승의 기쁨으로 재학생과 응원했던 전 동문이 |
| + |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 모교까지 거리행진을 해 학교에 도착하니 자정에 가까 |
| + | 운 시간으로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전교생이 학교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 날 수 |
| + | 업에 임했다는 일화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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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80년대 이후의 중동 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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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 특출한 성적으로 국내 무대는 물론 해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동 축구는 |
| + | 1980년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한ㆍ일 고교교환 경기에 출전해 3전 전승을 기 |
| + | 록했고, 그 해 서울특별시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한ㆍ |
| + | 일 수도권 교환경기대회에 일본팀과 대전해 3전 3승을 기록했다. |
| + | 당시 맹활약한 선수로는 68회 고청범, 이기석 이성용이상 전 청소년대표, 69회 이남 |
| + | 수, 최재필, 김재원이상 전 청소년대표, 70회 김성호전 청소년대표, 71회 유재영, 임지우, |
| + | 김원근이상 전 청소년대표, 72회 김용세전 월드컵대표, 74회 김광용현 모교 축구부 부장, 75회 |
| + | 조민국전 월드컵대표ㆍ현 고려대 감독, 변종국독일 유학청소년대표ㆍ현 아약스코리아 유소년축구단 |
| + | 단장, 차상광전 국가대표ㆍ성남 일화 코치, 76회 김종부전 월드컵대표ㆍ현 모교 감독, 77회 김남 |
| + | 호, 박동규이상 전 청소년 대표, 78회 차상해전 국가대표, 손태호현 모교 코치, 79회 허기태, |
| + | 서효원이상 전 국가대표, 김두선전 모교 코치, 김청훈현 청소년대표 코치, 80회 이승욱현 중 |
| + | 동중학교 감독, 81회 이병성전 청소년, 82회 송 훈전 청소년 대표, 김용범전 국가대표, 85회 |
| + | 김상훈, 박충균이상 전 국가대표, 서동훈, 박정민전 남북 단일팀 대표 94회 이호전 월드컵대표 |
| + |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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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4년에는 전국 중ㆍ고 축구대회에서 우승해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 학생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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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선수권 대회의 한국 대표로 출전해 활약했다. |
| + | 이에 앞서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 대 |
| + | 표팀은 전 세계의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해 한국 축구 |
| + | 의 놀라운 힘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당시 76회 김종부 동문은 공격수로 맹 |
| + | 활약해 세계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
| + |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래 32년만인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 |
| + | 하며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6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통산 |
| + | 7회 로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됨은 물론, 세계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 |
| + | 의 우수성을 지구촌의 모든 축구팬에게 과시했다. |
| + | 당시 멕시코월드컵에서는 72회 김용세, 75회 조민국, 76회 김종부 동문이 대표 |
| + | 선수로 발탁돼 우수한 기량을 선보이며 중동 축구를 빛냈다. 또한 1998년 프랑스월 |
| + | 드컵에서는 76회 정성진 동문이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로 참가했고, 2006년 독일월 |
| + | 드컵에서는 94회 이 호 동문이 좋은 경기를 펼쳐 중동 축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 |
| + | 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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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원히 이어 나갈 중동 축구의 영광 |
| + | 나라의 운명이 외세에 좌지우지되던 1900년대 초 탄생한 중동학교가 민족 교육의 |
| + | 요람으로 숭고한 의무를 지켜 온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이와 함께 중동인들도 축 |
| + | 구라는 매개체로 동문 간 뜨거운 애교심과 협동심을 통해 한국 축구계는 물론 국가 |
| + | 의 발전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를 창조해 냈다. |
| + | 우리 중동 축구 역사를 돌아볼 때 수많은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
| + | 우리 중동인의 뜨거운 축구 사랑과 선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 사자정신, 세계를 |
| + | 향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이야말로 중동 축구의 빛나는 역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
| + | 우리 중동 축구도 새롭게 시작한 21세기에 발맞춰 100년을 넘어 1천년 미래로 |
| + | 나가는 큰 발자국을 이미 내디뎠다. 새로운 환경에 발맞춘 지도자들의 노력과 선수 |
| + | 들의 땀, 수천수만 동문들의 모교 사랑, 불굴의 사자정신 등이 중동 축구의 미래를 |
| + | 밝혀 수천 년 후까지 중동 축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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