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 (언론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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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대 대표이사였던 [[전형두]]와 초대 감독 [[박항서]]의 알력 다툼이 시즌 종료 후 전형두와 박항서의 연이은 사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형두를 이어 제 3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도의원 김영조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며 감독 문제를 해결하였고, 구단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어서 구단을 성공 가도로 이끌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경영난과 1백억 원이 넘는 적자에 시달리던 스포츠서울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모시켜놓은 김영만 대표이사가 이사진의 만장일치를 통해 후임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 제 2대 대표이사였던 [[전형두]]와 초대 감독 [[박항서]]의 알력 다툼이 시즌 종료 후 전형두와 박항서의 연이은 사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형두를 이어 제 3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도의원 김영조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며 감독 문제를 해결하였고, 구단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어서 구단을 성공 가도로 이끌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경영난과 1백억 원이 넘는 적자에 시달리던 스포츠서울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모시켜놓은 김영만 대표이사가 이사진의 만장일치를 통해 후임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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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시즌 [[창원시]] 중심가 이마트 외벽에 큰 경기 홍보 통천이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경남의 프런트는 적극적 마케팅으로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조광래 감독의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가 맞물려 이 때부터 경남 축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지역 기업의 [[메세나]] 후원 참여, 그리고 각 지자체 대표상품이나 사립대학 등 다양한 스폰서를 끌어들여 재정을 탄탄하게 하였고, 팬들과 함께 노력하여 2010시즌부터 [[창원축구센터]]를 무상 임대하고, 엠블럼과 클럽 로고송을 교체하여 팀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팀을 급성장시켰고,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프런트 - 감독 - 팬의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은 경남은 2008시즌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2009시즌 후반의 놀라운 경기력, 2010시즌 창단 첫 리그 1위 기록 및 [[K리그 챔피언십]]진출 등 성적도 안정권에 들어왔다. | 2008시즌 [[창원시]] 중심가 이마트 외벽에 큰 경기 홍보 통천이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경남의 프런트는 적극적 마케팅으로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조광래 감독의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가 맞물려 이 때부터 경남 축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지역 기업의 [[메세나]] 후원 참여, 그리고 각 지자체 대표상품이나 사립대학 등 다양한 스폰서를 끌어들여 재정을 탄탄하게 하였고, 팬들과 함께 노력하여 2010시즌부터 [[창원축구센터]]를 무상 임대하고, 엠블럼과 클럽 로고송을 교체하여 팀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팀을 급성장시켰고,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프런트 - 감독 - 팬의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은 경남은 2008시즌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2009시즌 후반의 놀라운 경기력, 2010시즌 창단 첫 리그 1위 기록 및 [[K리그 챔피언십]]진출 등 성적도 안정권에 들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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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0년 중반 조광래 감독이 축협의 병맛행정을 맛보러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국가대표팀]]으로 떠난 후에도, 조광래 감독을 구단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 덕분에 2011시즌에도 창원 축구센터를 자주 찾는 조광래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하지만 2010년 중반 조광래 감독이 축협의 병맛행정을 맛보러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국가대표팀]]으로 떠난 후에도, 조광래 감독을 구단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 덕분에 2011시즌에도 창원 축구센터를 자주 찾는 조광래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2010년을 끝으로 임기가 끝난 김영만 대표이사도 조광래 감독의 뒤를 따라 사임(?)하면서 경남의 중흥기를 연 두 거인 모두가 경남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김영만 대표이사의 후임으로 전형두 대표이사가 임명되면서 일부 팬들에게 '[[김두관]] 구단주의 코드 인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강하게 듣기도 했다. | 2010년을 끝으로 임기가 끝난 김영만 대표이사도 조광래 감독의 뒤를 따라 사임(?)하면서 경남의 중흥기를 연 두 거인 모두가 경남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김영만 대표이사의 후임으로 전형두 대표이사가 임명되면서 일부 팬들에게 '[[김두관]] 구단주의 코드 인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강하게 듣기도 했다. |
2011년 12월 18일 (일) 16:24 판
김영만 (1957년 8월 20일 - 현재)은 대한민국 국적의 언론인이자 축구계 인사다.
약력
- 성명 : 김영만 (Kim Young-Man)
- 출생일 : 1957년 8월 20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 학력 : 진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졸업 - 소속 : 위키트리
- 직책 : 발행인 겸 사장
- 경력 : 서울신문사 기자
서울신문사 경제부장
서울신문사 편집국장, 판매국장, 광고국장, 경영기획실장
서울신문사 이사 겸 논설위원실장
스포츠서울 발행인 겸 대표이사
창원대 신문방송학과 초빙교수
경남 FC 대표이사
경남에서의 생활
제 2대 대표이사였던 전형두와 초대 감독 박항서의 알력 다툼이 시즌 종료 후 전형두와 박항서의 연이은 사임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전형두를 이어 제 3대 대표이사로 선임된 도의원 김영조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며 감독 문제를 해결하였고, 구단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어서 구단을 성공 가도로 이끌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경영난과 1백억 원이 넘는 적자에 시달리던 스포츠서울을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가히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모시켜놓은 김영만 대표이사가 이사진의 만장일치를 통해 후임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2008시즌 창원시 중심가 이마트 외벽에 큰 경기 홍보 통천이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경남의 프런트는 적극적 마케팅으로 최선을 다했고, 거기에 조광래 감독의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가 맞물려 이 때부터 경남 축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공격적인 홍보를 통해 지역 기업의 메세나 후원 참여, 그리고 각 지자체 대표상품이나 사립대학 등 다양한 스폰서를 끌어들여 재정을 탄탄하게 하였고, 팬들과 함께 노력하여 2010시즌부터 창원축구센터를 무상 임대하고, 엠블럼과 클럽 로고송을 교체하여 팀 이미지를 쇄신하는 등 팀을 급성장시켰고,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 프런트 - 감독 - 팬의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은 경남은 2008시즌 대한민국 FA컵 준우승, 2009시즌 후반의 놀라운 경기력, 2010시즌 창단 첫 리그 1위 기록 및 K리그 챔피언십진출 등 성적도 안정권에 들어왔다.
하지만 2010년 중반 조광래 감독이 축협의 병맛행정을 맛보러 국가대표팀으로 떠난 후에도, 조광래 감독을 구단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 덕분에 2011시즌에도 창원 축구센터를 자주 찾는 조광래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0년을 끝으로 임기가 끝난 김영만 대표이사도 조광래 감독의 뒤를 따라 사임(?)하면서 경남의 중흥기를 연 두 거인 모두가 경남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김영만 대표이사의 후임으로 전형두 대표이사가 임명되면서 일부 팬들에게 '김두관 구단주의 코드 인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강하게 듣기도 했다.
경남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2011년 5월 31일 위키트리 발행인 겸 사장으로 부임해 일을 하는 중이다. 조광래 감독이 국가대표에서 경질된 후,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일부 경남팬들을 울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