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학시절 그를 눈여겨보던 [[박종환]]감독의 눈에 띄어 2003년 [[대구 FC]]에 입단했다. 입단당시에는 부상으로 인해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이듬해인 2004년부터 실력이 만개했다. 당시 홍순학은 '홍반장'이라는 별명답게 뛰어난 조율능력, 좋은 패스로 공격수들에게 좋은 볼을 많이 공급했고, 27경기 7도움으로 K-리그 도움왕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다른선수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터라 홍순학의 도움왕의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 + | 대학시절 그를 눈여겨보던 [[박종환]] 감독의 눈에 띄어 2003년 [[대구 FC]]에 입단했다. 입단당시에는 부상으로 인해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이듬해인 2004년부터 실력이 만개했다. 당시 홍순학은 '홍반장'이라는 별명답게 뛰어난 조율능력, 좋은 패스로 공격수들에게 좋은 볼을 많이 공급했고, 27경기 7도움으로 K-리그 도움왕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다른선수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터라 홍순학의 도움왕의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
| − | 대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홍순학은 2006년, [[노병준]] [[이정운]]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진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의 그라처 AK로 이적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에이전트가 원소속팀 대구의 동의없이 오스트리아로 진출시켰고, 이에 반발한 대구가 홍순학의 이적동의서를 발급해주지 않으면서 난관에 부딫혔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의 동의를 받은 홍순학은 오스트리아 무대에 뛰어들었으나,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며 고작 정규리그 3경기 출전에 그친 뒤 방출되고 말았다. (사실은 8개월짜리 단기계약이었고, 구단측에서 재계약 제의를 하지 않았다.) | + | 대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홍순학은 2006년, [[노병준]] [[이정운]]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진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의 그라처 AK로 이적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에이전트가 원소속팀 대구의 동의없이 오스트리아로 진출시켰고, 이에 반발한 대구가 홍순학의 이적동의서를 발급해주지 않으면서 난관에 부딫혔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의 동의를 받은 홍순학은 오스트리아 무대에 뛰어들었으나, 연습생 신분에 심하게 낙담하며,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며 고작 정규리그 3경기 출전에 그친 뒤 방출되고 말았다. (사실은 8개월짜리 단기계약이었고, 구단측에서 재계약 제의를 하지 않았다.) |
| − | 2007년 2월 K-리그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한 홍순학은 수원의 레귤러 멤버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의 충격이 좀 컸던 탓인지 아직까지 수원에서 골은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REF>참고로 홍순학은 2009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가시마전에서 수원소속으로 첫 골을 넣은적이 있다.</REF> 하지만, 홍순학은 공격적인 성향에서 홀딩성향의 미드필더로 전환, 철벽방어를 보여주었고, [[2008년 K-리그]] 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윤성효]]감독 부임이후 부상이 겹치며 방출 리스트에 오를 뻔 하였으나 기사회생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 + | 2007년 2월 K-리그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한 홍순학은 수원의 레귤러 멤버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의 충격이 좀 컸던 탓인지 아직까지 수원에서 많은 어시스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REF>2007년, 2009년 각각 1어시스트가 최고 기록.</REF> 하지만, 홍순학은 공격적인 성향에서 홀딩성향의 미드필더로 전환, 철벽방어를 보여주었고, [[2008년 K-리그]] 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윤성효]] 감독 부임이후 부상이 겹치며 방출 리스트에 오를 뻔 하였으나 기사회생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