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2회 (1936년)) |
잔글 (→개요) |
||
40번째 줄: | 40번째 줄: | ||
=== 3회 (1937년) === | === 3회 (1937년) === | ||
+ | * [[보성전문|전보성축구단]]이 우승하여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 ||
=== 4회 (1938년) === | === 4회 (1938년) === | ||
+ | 1938년 대회는 완전히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조선예선으로써 기능하였다. 조선중앙예선에서 [[연희전문|전연전축구단]]이 전보성축구단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후 관서지부의 추천을 받은 진남포 일광팀과 대전하여 우승팀을 결정하게 되었으나 일광팀이 기권하여 전연전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 ||
=== 5회 (1939년) === | === 5회 (1939년) === | ||
+ | 1939년 대회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조선예선으로 치뤄졌는데 3개지역 대표가 출전하였다. 경기(경성)대표는 경성써커를 9대0으로 꺽은 [[보성전문|전보성군]]이 출전했으며, 함북대표는 [[청진축구단|청진군]], 함남대표 [[함흥축구단|함흥군]]이 출전하였다. [[보성전문|전보성군]]이 준결승전에서 청진축구단을 꺽고 결승전에서 함흥추구단을 꺾어 우승을 차지하였다. 경기에 들어가기전 국기(일본기)게양, 국가제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제창을 하는 등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의 대회로 전락. | ||
+ | |||
+ | === 6회 (1940년) === | ||
+ | 1940년 대회는 [[연희전문|전연전군]]이 함흥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일본추구선수권대회]] 본선에는 전연전군, 전보전군 2팀이 출전했다. | ||
− | |||
− | |||
== 같이 보기 == | == 같이 보기 == | ||
* [[전조선축구대회]] | * [[전조선축구대회]] |
2011년 7월 15일 (금) 00:34 판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 | |
---|---|
국가 | 일제강점기 조선 |
설립 연도 | 1935년 |
리그 폐지 | 1940년 |
최다 우승 | 보성전문 (3회 우승) |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는 1935년~1940년에 조선축구협회의 주최로 열렸던 축구대회이다. 주로 4~5월경 열려 10~11월에 열렸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일제강점기 양대 축구대회였으나, 일본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현, 덴노배)의 조선예선으로써 기능하였기 때문에 조선신궁대회와 마찬가지로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개요
1933년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된 이후에도 최고 권위의 전조선축구대회는 계속해서 조선체육회의 주최로 운영되었으며, 1934년부터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일부로 편입된 상황이라 조선축구협회는 전만주축구단, 동경유학생, 영,불함대축구팀 등 과의 교류전 정도만 주최하는 형편으로 전조선의 축구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다시 축구가 부활함에 따라 당시 대일본축구협회(현 일본축구협회)가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강화책으로 올림픽 대표선발을 의미도 다소 포함된 제1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15회 덴노배)를 메이지신궁경기대회와 분리하여 개최하게 됨에 따라 그 조선예선으로써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1회 (1935년)
1935년 5월 14,15 양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조선축구협회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관람료는 성인 30전, 학생 20전. 평양에서 평양축구단, 고려축구단, 경성에서 서울축구단, 경성축구단 총 4팀이 출전 신청을 하였으나 고려축구단과 서울축구단이 기권하여,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의 결승전이 열렸다. 후반 20분 경축 채금석의 어시스트를 배종호가 골로 연결하여 1 대 0 으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2회 (1936년)
1936년 2회대회는 이전까지 봄에 열리던 오사카아사히신문 경성지국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를 합병하여 5월 7,8,9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자격으로 조선축구협회 가맹팀에 한했으므로 경기신청시 조선축구협회 가맹신청서 및 회비 10원을 함께 받았다.
대회 우승팀인 보성전문에게는 6월 6,7일 일본에서 개최되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출전자격이 주어졌다.
3회 (1937년)
- 전보성축구단이 우승하여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
4회 (1938년)
1938년 대회는 완전히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조선예선으로써 기능하였다. 조선중앙예선에서 전연전축구단이 전보성축구단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후 관서지부의 추천을 받은 진남포 일광팀과 대전하여 우승팀을 결정하게 되었으나 일광팀이 기권하여 전연전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5회 (1939년)
1939년 대회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조선예선으로 치뤄졌는데 3개지역 대표가 출전하였다. 경기(경성)대표는 경성써커를 9대0으로 꺽은 전보성군이 출전했으며, 함북대표는 청진군, 함남대표 함흥군이 출전하였다. 전보성군이 준결승전에서 청진축구단을 꺽고 결승전에서 함흥추구단을 꺾어 우승을 차지하였다. 경기에 들어가기전 국기(일본기)게양, 국가제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제창을 하는 등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의 대회로 전락.
6회 (1940년)
1940년 대회는 전연전군이 함흥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일본추구선수권대회 본선에는 전연전군, 전보전군 2팀이 출전했다.
같이 보기
참고
- ↑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상 -1935-04-01,동아일보-,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하 -1935-04-01,동아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