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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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함흥축구단.jpg
41년 3도시대항전 우승 후 기념촬영한 함흥축구단.[1]

함흥축구단(咸興蹴球團)은 1938년 함경북도 함흥을 연고로 하여 창단된 축구 클럽이다.

일제강점기 경성, 평양 중심으로 양강 상태였던 축구판을 3강 구도로 재편성케했던 축구단으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편집]

창단 이전[편집]

1921년 10월 24일, 함흥축구단을 조직했다는 기사가 있으나[2],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1938년 함흥축구단이 조직되기 전까지 함흥에는 일본인 만으로 구성된 야구단과 조선인과 일본인이 절반씩 섞인 럭비팀만이 있었다고 한다[3]. 그러나 1938년 이전에도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등에서 함흥의 참가 기록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38년 이전까지 함흥축구단의 존재는, 대회가 있으면 그때 그때 유력 선수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 대회에 참가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축구 판도는 경성평양이 양분하고 있었다. 그 외 여타 지역은 이 구도를 뚫어낼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전국 대회에서의 성적도 일천한 상황이었다. 이는 함흥도 마찬가지라 함흥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지속한 이는 함흥영생학교[4] 출신으로 평양 축구단에서 포워드를 맡았던 이기환 뿐이었을 정도.[5]. 그럼에도 함흥 축구단 창단을 위한 움직임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 창립 당시 함경도 대표로 참석한바 있는 이성주는, 이후에도 지방 이사(理事)의 자격으로 전조선축구대회경평전을 자주 관전하였으며 조선축구협회 함경남도 지부를 결성하여 관북지방 축구 보급에 힘쓰는 한편, 1935년 이후 경평전이 중지 상태에 들어가자 함흥의 유지였던 김명학ㆍ경성축구단의 임흥순 단장ㆍ평양축구단의 최일 단장과 함께 모임을 갖고 경성/평양/함흥이 참가하는 3도시대항축구전 개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36년에는 함흥에서 이성주, 홍덕수[6], 한설야[7], 전상수 등 체육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함흥체육회가 조직되었으며, 1937년에는 함흥영생고등보통학교(이하, 영생고보라 한다.) 및 함흥고등보통학교(이하, 함흥고보라 한다.) 출신들을 중심으로 함흥축구팀을 조직, 동년 가을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첫 전국대회 출전임에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자 정식 축구단 창단의 여론이 높아지기에 이르렀다.[8].


창단[편집]

그리하여 1938년 6월 20일 , 함흥시 군영통에 있는 김명학외과병원에서 함흥의 체육계 인사들이 모여 함흥축구단을 정식 창단하게 되는데.. 창단 당시 함흥축구단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9].


함흥 축구단 창단 멤버
포지션 이름
스탭진
단장 & 부단장 김명학(정)ㆍ이성주(부)
총무 & 간사 홍덕수ㆍ전상수
주무 이덕정ㆍ안명준
감독[10] 문태수
선수단
모기춘[11]ㆍ김인철[12]이방림송기수ㆍ황정현[13]ㆍ이기환ㆍ임영순


하지만 창단 멤버 숫자가 정식 경기를 하기에도 부족했던 함흥 축구단은, 팀을 이끌 수 있는 코치 및 선수들을 스카우트 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 코치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연희전문 출신으로 경성축구단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던 이유형. 당시 조선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여운형의 도움과 김용식 씨의 조언으로 이유형이 함흥 축구단 코치 겸 선수로 부임하자, 선수 추가 스카우트는 수월하게 진행되기에 이른다. 특히 함흥 축구단 총무 홍덕수는 평양 숭실전문 출신이라는 이력을 활용, 같은 숭실전문 및 광성고보 등 평양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이외에도 경성ㆍ평양 등지의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던 것. 이 때 추가 영입된 선수들 목록은 아래와 같다.


함흥 축구단 추가 영입
이름 출신
조용해ㆍ김희수ㆍ홍종칠 대구
노택림ㆍ박명서ㆍ옥정빈ㆍ김월용[14]차순옥ㆍ한선원 평양
오의근 경성
강도희ㆍ정국진이용일김성간[15]이유형 (선수 겸 코치) 연희전문

전성기와 해체[편집]

이처럼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등장한 함흥 축구단은 1938년 10월, 3도시대항축구전에서 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으며 이어 11월 열린 전조선종합축구대회, 이듬해인 1939년 열린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에서도 연거푸 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보인다. 여기에 전조선축구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도 참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1939년과 1940년 일본에서 열린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2연패를 거두었을 정도였다.[16] 특히 1940년 명치신궁대회에서는 4전 4승에 23득점 0실점으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며 우승을 거머쥐었을 정도.[17]

하지만 1941년부터 명치신궁경기대회에 지역 연고팀이 아닌, 실업팀 출전만을 허용하면서 함흥의 대회 3연패 시도는 불가능해졌으며, 이어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금지령이 시행되면서 함흥축구단 역시 다른 지역 축구단과 마찬가지로 활동을 중단ㆍ해체하게 된다.


계승[편집]

2003년 실향민 2세, 3세를 위주로 재창단된 FC 함경남도 축구단 은 1938년에 창단된 함흥 축구단 계승을 모토로 하고 있다. 이들은 대한축구협회 등록 이종클럽 대회인 코니그린컵에 참가하고[18], 매년 시축식을 갖는 등[19]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기록[편집]

주요 인물[편집]

함흥이 창단 직후 돌풍을 일으키며 신생 강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함흥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 김명학 : 김명학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외과개업의로서, 함흥부회의원, 함경도평의원을 겸직하고 있었다. 그의 영향력과 재력은 막강하여, 일본인 함경도지사가 부임해와도 그를 먼저 접견했을 정도로 지역 유력 인사였다.[5][20] 그는 승마, 사냥, 스케이트 등을 즐기는 스포츠 광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함흥축구단 창단을 주도하고 단장직에 선임되기에 이른다. 광복 이후에는 월남하여 김명학외과병원을 개원하였으며, 대한축구협회 및 대한승마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 이성주 : 함흥동명극장과 양조장을 운영하는 재력가로써 조선축구협회 지방이사 겸 조선축구협회 함경남도 지부장 및 함흥체육회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함흥 축구단에서는 부단장으로 선임되어, 명치신궁경기대회 일본 원정단에도 참가하는등 공무가 바빴던 김명학을 대신해 사실상 함흥 축구단의 얼굴 마담으로 활약하였다.
  • 문태수 : 금융회사 경영인의 아들로, 동경제3고와 교토제국대학를 나와 함남도청 이재부에 근무하였으며 함흥 축구단 창단 무렵에는 함흥상업창고 주식회사 이사로 활동하며 함흥 지역 유지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흥을 대표하는 거부중 한명으로 함흥여고보 설립에 2만원을 쾌척해 전국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을 정도. 이런 사람이 발벗고 나서서 함흥 축구단 운영을 도맡았으니.. 선수단 대우가 좋을 수 밖에 없었을듯.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회사에 선수들을 전부 취직시키면서, 직장 근무는 오후 2시까지만 하고 이후 시간은 훈련을 하게 하였다. 선수들에게 월급 외에 수당을 지급하였으며, 1주일에 한번씩 건강상태 체크 및 갈비 제공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는 후문. 여기에 이유형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해외 원정을 앞두고는 김치를 식단에서 빼버리고 일식과 양식으로만 식단을 구성해 타지 적응력을 키우는 선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21].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함흥은 전국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였으며, 이유형 코치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 당시 합숙 경험을 토대로 과학적인 체력 훈련을 편성, 선수들을 지도한다.[22]. 이러한 점들은 함흥이 명문 축구팀으로 거듭날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역대 주요 성적[편집]


함께 보기[편집]


외부 문헌[편집]

  • 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11-123.
  • 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234-235.


참고[편집]

  1. 뒷쪽 좌측부터 이성주 단장. 한선원, 정국진, 김인철, 김희수, 오의근 트레이너. 앞쪽은 좌측부터 이기환, 노택림, 이유형, 차순종, 옥정빈, 황경오 씨라고 한다. 출처는 월간축구 1972년 9월호
  2. 함흥축구단 조직 1921-10-30, 동아일보
  3. 그때 그일들 "288" 김덕준 (14)패기 넘쳤던 함흥축구단 1976-12-11, 동아일보
  4. 함흥영생학교는 1909년 개교하여 1950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고등학교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교되었다가 1990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재개교하였다.
  5. 5.0 5.1 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11.
  6. 194ㆍ5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홍덕영 씨의 큰형으로 알려져있다.
  7. KAPF의 대표 작가이자 북한에서 문화상을 지냈던 그 한설야가 맞다
  8. 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 234.
  9. 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p.235.
  10. 실질적으로 축구 팀을 지도하고 전술을 짜는 역할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니라, 선수단에게 숙식 등을 제공하는 관리인 역할이었다.
  11. 당시 함흥을 대표하는 아이스스케이트 선수로 더 유명했다. 영생고보 출신이며, 1971년 11월호 월간축구에 실린 이유형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여류 시인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모윤숙 씨의 오빠라고 한다.
  12. 영생고보 출신으로 원래는 정구 선수 출신. 함흥 축구단에서는 CF로 대활약하였다. 여담으로 1933년 함흥 일대를 뒤흔들었던 영흥농민조합 소요 사건 당시 김인철이 적극 가담자로 분류되어 2년형을 언도받은 것으로 나오는데,([1]) 동명이인인지 동일인인지는 불확실하다.
  13. 배재중학,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유학에서 돌아와자마자 함흥 축구단 멤버로 참가하였다. 포지션은 라이트 하프백풀백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14.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B%94%EC%9A%A9
  15. 단, 이용일과 김성간 선수는 1939년에 함흥 축구단에 스카우트된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1년 정도 늦게 합류한 셈.
  16. 이 대회는 1935년 조선축구협회대표팀이 우승을 거두었던 대회이기도 하다. 다만 35년 우승은 사실상 조선축구협회 올스타팀이었던 반면, 함흥은 경우 단일팀 멤버로 우승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17. 다만 함흥은 일본 대회에 출전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1939년ㆍ1940년 2년 연속 3도시대항축구전에 불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8. 'FC 함남' 축구협 공식대회 첫 출전 2005-04-25,스포츠서울
  19. http://blog.daum.net/jdwj58/14526188
  20. 당시 김명학 씨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월간축구 1972년 12월호에 따르면, 1939년 여름 함남축구대회 후 발생한 소요 사태(당시 지방 축구대회가 열리면, 서울 선수들이 지역 유지들의 의뢰로 대신 경기를 하는 일이 많았다. 이 대회에서도 서울 선수들이 내려가 함남축구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호화 접대(?)를 받던 중 함흥 토박이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이 다툼이 패싸움으로 번졌고 이 싸움에 함흥 군민들까지 가세,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서울 선수들은 함흥 축구단을 이끌고 있었던 이유형 씨 집으로 피신했고, 이유형 씨는 즉각 김명학 단장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고. 이에 김명학 씨는 직통으로 함흥헌병분대장에게 전화를 걸고 헌병대를 출동시켜 소요 사태를 진압했다고 한다.. 교차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 김명학 씨 위세가 일본 헌병대 출동을 이끌어낼 정도로 막강했던 셈이 된다. 동시에 이는 김씨가 친일파라는 증거도 되는셈. 실제로 김명학 씨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내에 지역유력자 부문으로 선정되었다..
  21. 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14. & 월간축구 1971년 12월호, p.90
  22. 다만 월간축구 1971년 12월호 이유형 씨 인터뷰에 따르면, 위의 체력 훈련이 워낙 강행군이었던터라 선수들의 불만이 대단했다고 한다. 여기에 경기 도중 선수들의 체력이 방전되서 어이없게 보성전문에게 경기를 내주는 사태가 발생하자, 체력 훈련 일변도가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이후로는 훈련 강도를 낮추셨다고..